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63년 6월
여전히 대기에 떠다니는 미세먼지 때문인지 입안이 까끌까끌하고 목이 간지러워진 태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몇 차례 반복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자 배낭에서 500mL짜리 에너지 티(energy tea)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미끄러지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덕분에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태준은 손에 쥔 작은 알루미늄 용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너지 티는 갈증 해소뿐만 아니라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주요 식수로 활용되었다. 산업혁명 이전으로 지구 환경을 복원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내건 세계 정부의 푸른 로고가 재활용 마크와 함께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푸른 지구를 배경으로 대표적인 기후변화 생물지표인 박새와 북극곰, 그리고 대왕고래가 그를 향해 곰살궂게 웃었다. 태준은 세계 정부의 상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전(前) 인류에게 선물이자 동시에 재앙이었던 플라스틱 사용이 전면 제한되면서 기업들은 세계 정부가 승인한 재활용 가능 소재만 사용했다. 담수 오염도가 치명적인 터라 세계 정부의 까다로운 설비 기준을 통과한 기업에게만 에너지 티를 생산할 자격이 주어졌다. 공장 가동을 위한 전력은 전적으로 재생에너지로만 충당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이런 이유, 저런 핑계로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일들이었다. 누군가는 전화위복이라고 말했지만, 왠지 그는 그런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든 파멸의 주간 이후 재생에너지 주요 공급원인 태양열도 바람 세기도 훨씬 강해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배터리 저장기술이 혁신을 거듭했고 민간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전력 공급 시장도 안정권에 들어섰다. 이런 바람직한 변화들이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고 이루어졌다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지만 늦게라도 바른길로 들어서 다행이었다. 입안에 이물감이 사라지자 태준은 다음 장면으로 화면을 넘겼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화면 한가운데 온몸에 털이 모조리 빠진 채 바짝 말라죽은 북극곰 사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보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 사진을 처음 본 순간 즉시 멈춰야만 했어. 어쩌면 지구는 우리에게 계속 말해 주려고 했는지도 몰라. 내일이면 늦으니까 지금 당장 변해야 한다고 말이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진으로 가슴 아파하고 눈물 흘렸는지 몰라. 북극곰을 살리기 위해 대대적인 모금 활동이 벌어지기도 했지. 그건 나름대로 의미 있었지만 그뿐이었어. 사용하지 않는 가전제품의 콘센트를 뽑아두거나 빈방의 전등을 끄는 것처럼 사소하더라도 진짜 필요한 일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여전히 관심 밖이었지. 하다못해 플라스틱 일회용기 사용만이라도 줄여야 했어. 모피 코트를 사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지. 풍요로움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더 갈망했지.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뭔지 아니? 지구 한 편에서는 음식물 쓰레기가 처치 곤란할 정도였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명이 굶어 죽었어. 그렇게 모순덩어리 세상을 어물쩍거리다 마침내 그날과 맞닥뜨린 거야. 파멸의 주간 말이야. 몇몇 급진적인 기후과학자들이 목이 터져라 경고했던 일들이 마치 초원에서 썩어빠진 동물의 사체를 발견한 하이에나 떼처럼 한꺼번에 달려들었어. 기후과학자들이 우려했던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넘어선 거야. 그것도 한날한시에 말이야. 무엇이 도화선이 됐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실 아무거나 상관없었지. 결국 벌어질 일이었으니까. 그때 아버지는 대학에서 막 공부를 끝내고 지방의 작은 기후연구소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어. 중학생 때 우연히 읽은 그레타 툰베리 자서전 덕분에 ‘FFF(미래를 위한 금요일)’ 활동에 참여한 게 인연이 되었지. 아무튼 지구를 위해,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려던 순간 그 일이 터지고 만 거야. 그 일주일은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강의 시간에 교수님들께 배운 지식은 하나도 통하지 않았어.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지. 요즘도 가끔 그날의 일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꿈에 나타나. 그런 날은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완전히 잠들지도 완전히 깨어 있지도 못한 상태로 아침을 맞이해. 망각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는데 신도 단단히 화나셨나 봐.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일을 겪은 많은 사람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거든. 도대체 어떻게 그런 대규모 재앙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을까? 수만 대의 인공위성과 수백 곳의 기후감시센터가 1초도 쉬지 않고 지구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말이야. 순식간에 바닷물이 불어나 해안에 인접한 도시들이 눈 깜짝할 사이 사라져 버렸어. 미처 대피할 틈도 없었지. 그 지역에 살던 가엾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을 거야. 그나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하면 피해가 적은 편에 속했어. 가까운 이웃 나라는 면적의 50% 이상이 물아래 잠겨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지. 순한 양 같던 바다가 난폭한 사자가 되어 벌벌 떨고 있는 도시를 한입에 삼켜버렸어. 그 모습을 우연히 카메라에 담았던 기자는 평생을 악몽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지 뭐야.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살아남은 이들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거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지. 파멸의 주간을 시작으로 극지방은 점점 더워졌고 적도지방은 점점 추워졌어. 온도가 오른 만큼 더하고 내려간 만큼 빼면 결국 총합은 비슷했지만, 더 이상 우리에게 너그러운 어머니 지구가 아니었어. 비틀거리며 외줄 타기를 하던 균형점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기후 체계가 온통 뒤죽박죽 되어버렸지. 이와 동시에 곪았던 상처가 썩은 고름을 토해내듯 곳곳에서 알 수 없는 악취도 풍겼어. 어떤 지역은 얼마나 냄새가 심한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고 하더라. 그뿐인 줄 알아? 1년 동안 산불이 꺼지지 않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이 점점 늘어났어. 어떤 나라는 메뚜기떼가 한 해 농작물을 깡그리 먹어 치우기도 했어. 지진과 태풍은 매번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며 살아남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어. 자포자기한 사람들이 수군거렸어. 저세상에선 지옥이 사라졌을 거라고.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이었거든.”
태준은 그 일들이 마치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흡이 가빠지며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였다. 그가 숨 쉬는 한 끝나지 않을 고통이었다. 그 순간 손목시계에서 경쾌한 알람음이 울렸다. 신경 안정제를 복용할 시간이었다. 태준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약통을 꺼내 액상 신경 안정제 하나를 꿀꺽 삼켰다. 그날의 기억처럼 이 작은 약통과도 평생 함께 지내야 할 운명이었다. 약 기운이 서서히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몸도 마음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약통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그는 다음 할 말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다음 편에 계속…)
<이미지 출처 : Pixabay, Paul Nicklen 인스타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