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소원. Chapter 4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63년 6월

by 조이홍

“익숙했던 일상이 송두리째 사라졌어도 삶은 계속되어야만 했어. 어쨌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야 했으니까. 악착같이 견뎌냈지. 그러다 2035년을 맞이했어. 그때까지 붕괴하지 않고 정상적인 시스템이 작동하는 나라의 대표들이 하얀 눈이 사라진 노르웨이의 오슬로에 모였어. 항공 시스템 마비로 우리나라 대표단은 4주나 걸리는 바닷길로 이동했지. 그때 아버지도 기후학자로 대표단에 합류했어.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어. 게다가 어찌나 뱃멀미가 심했던지 처음 사흘은 내내 누워 있기만 했지. 너한테만 귀띔하자면 솔직히 그날 이후로 바다 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거든. 어릴 시절 그렇게 좋아했던 바다였는데…. 넘실대는 파도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렸지 뭐야. 회의가 열린 노벨 평화 센터 분위기는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든 긴장감으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대한 애드벌룬 같았어. 그런 자리는 처음이라 그런지 아버지는 숨쉬기조차 힘들었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자는 공허한 말을 내뱉는 대표단은 아무도 없었어. 너무 뜨거워진 지구를 식혀 줄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대안이 필요했거든. 지구 공학자들이 회의 분위기를 이끌었어. 여전히 국제 사회에 강한 입김을 불어넣던 몇몇 강대국들이 대놓고 그들을 지원했거든. 거대한 부를 축적한 국가들은 지구가 뜨거워지는 걸 더는 방관할 수 없었어. 그랬다가는 이제껏 자신들이 누려온 기득권마저 위태로워질 게 분명했으니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지. 아무튼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무모한 모험가라고 놀림당하던 괴짜 과학자들이 몇 가지 흥미로운 해법을 제시했고, 국제 사회의 합의를 요구했어. 대기권에 무수히 많은 태양광 반사경을 설치해 태양으로부터 오는 열에너지를 조절하거나 인공구름을 만들어 지구로 유입되는 햇빛을 막는 기술이었어. 그들은 극히 제한된 지역에서의 성공 사례와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데이터를 들이밀며 성공할 거라고 확신했어. 그 방법들은 기발하긴 했지만, 전 지구를 대상으로 실행하기에는 상당한 위험이 뒤따랐어. 일부 개발도상국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천문학적 비용도 문제였지. 부자 국가들이 천연자원 개발권과 탄소배출권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달 자원 개발을 둘러싼 얽히고설킨 국제관계로 그것마저 쉽지 않았어. 결국 지구 공학자들의 의견에 동조했던 몇몇 국가들만이라도 밀어붙이겠다고 옹고집을 피웠어. 땅에는 국경이 있어도 순환하는 대기에는 국경이란 없는 법이잖아. 몇몇 국가들이 기후를 임의로 조절했을 때 이웃 국가들에 미칠 영향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지. 각국 대표들의 갑론을박이 이틀이나 계속되었어. 지구로부터 그토록 호된 경고를 받았건만 자신들 이익만 지키려고 할 뿐 한치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어. 우리 대표단이 발의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과 화석 연료 사용 중단안’은 논의조차 하지 못했어. 오늘날 재생에너지 분야에서 초일류 기업이 된 한 벤처기업의 고효율 배터리 저장기술을 기반으로 한 설득력 있는 계획이었는데 말이야. 결국 장난감 가게 진열장에 놓인 속은 텅 비고 포장만 화려한 선물상자들처럼 미사여구와 실행하지 못할 결의들로 가득 찬 오슬로 선언문이 채택되었어.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마저 우리 스스로 차 버린 거야. 아버지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 만약 그때 아버지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아니 조금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우리 계획을 공론화시키고 관철시켰더라면 미래가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그럼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서율이도 잃지 않고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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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의 좁은 어깨가 들썩거렸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마른땅 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사실 그때 그가 낙담한 채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 건 아니었다. 공식 일정이 끝나면 각국 대표단에 소속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나 열띤 토론을 벌였다. 지구온난화의 근본 원인이라고 판명된 화석 연료 사용을 중단해야 한다고 동료 과학자들을 설득했다. 천천히 가더라도 분명한 한 걸음을 함께 내딛자고 간절히 호소했다. 대부분의 기후학자들은 그의 의견에 공감했지만 결국 회의장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려는 정치가들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침묵의 결과는 참담했다. 3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파멸의 주간은 신의 가벼운 장난에 불과했다고 빗댈 만큼 역사상 유례없는 ‘최후의 날’을 맞이해야만 했다. 이번에는 진짜 성난 신이 태준의 무능함을 꾸짖기라도 하듯 사랑하는 아들마저 빼앗아 갔다. 기상 관측 역사 이래로 가장 더웠던 12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후 관련 마지막 국제회의가 열린 건 2060년이었어. 회의는 우리나라에서 열렸는데 참가한 나라는 고작 10개 국가밖에 되지 않았어. 대다수 정부가 붕괴하고 폭동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가 돼버렸거든. 그때 모인 10개 국가가 세계 정부의 토대가 되었지. 2059년은 역사상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되었어. 기후 위기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2020년에 비해 평균 기온이 무려 5도나 올랐거든. 결국 당시 정부 간 기후협의체에서 발표한 여섯 개의 시나리오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렸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어떤 시나리오도 5도나 상승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거든. 바다가 육지의 50%를 덮어버렸고 인구도 3분의 1만 겨우 살아남았어. 인류가 쌓아 올린 위대한 마천루가 스스로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셈이지. 그런데 그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니? 너무 뻔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머니 지구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어. 2060년을 정점으로 온실가스가 조금씩 줄어들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지. 인간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어떤 화석 연료도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풍요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지구 환경복원을 추구하는 세계 정부가 이듬해 탄생했어. 세계 헌법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동등한 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지구 법학 정신에 기초했어. 인간이 두 가지 깨달음을 얻은 덕분이었어. 새삼 새로울 것도 없지만 값비싼 희생을 치른 덕에 뼛속 깊숙이 각인되었지. 지구는 대체할 수 없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삶의 터전이며 그 안에서 자연은 생명 여부와 상관없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 말이야.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줄어든다고는 해도 그간 워낙 많은 온실가스가 켜켜이 쌓여 적어도 대가속이 시작된 20세기 말 수준으로 돌아가려면 수십 년이 걸릴지 수백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데. 두 번의 거대한 재앙을 통해 인류는 많은 걸 배웠지만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았어. 서율아, 근데 그거 알아?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은 전쟁이나 핵폭탄이 인류를 멸망시킬 거라고 공포에 떨었데. 정작 인류를 대재앙으로 이끈 건 멈추지 못한 풍요 때문이었는데 말이야. 삶이란 어찌 이리도 모순적인지 가끔 너무 화가 나 웃음이 나올 때도 있어. 이럴 때 보면 인간은 참 불완전한 존재 같아. 어쩌면 이게 진화론의 진짜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신이 자신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다면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지 않았을 테니 말이야. 어이쿠, 과학자가 별 쓸데없는 말을 다 하네. 서율아, 아버지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어. 그건 바로 우리 아들한테 '눈'을 보여주는 거야.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눈 말고 하늘에서 내리는 차갑고 하얀 결정 말이야. 아버지 어릴 때만 해도 눈 오는 날이면 친구들과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하면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모른단다. 손이 꽁꽁 얼 정도로 추운데도 온종일 밖에서 뛰어놀았어. 아마 할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눈밭을 뒹굴었을 거야.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을 밝으면 뽀드득하는 소리가 얼마나 기분 좋던지. 솜이불처럼 포근한 감촉은 또 어떻고. 할머니는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면 왠지 달콤한 솜사탕 맛이 나는 듯했어. 어때, 눈이란 거 정말 근사하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다시 눈이 내리게 될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서율이를 위해, 그리고 새로운 지구를 만들어갈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못난 어른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 될 거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 아버지가 또 바빠질 것 같아. 한동안 만나러 오지 못해도 이해해 줄 수 있지? 그 대신 오늘은 우리 아들과 이렇게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밤새도록 함께 있을게. 서율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버지는 널 느낄 수 있단다. 지금도 네가 아버지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다는 걸 눈치챘거든. 그런데 참 이상하다. 네가 곁에 있어도 네가 이렇게 그리우니….”

어느새 어둠이 소리 없이 바짝 다가왔다. 덩그러니 혼자 뜬 달이 은은한 빛을 뿌려 흐느끼는 태준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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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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