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6년 4월
이제껏 본 집 중 가장 단조롭고 지루하게 생긴 집이었다. 요즘은 시골 마을회관도 이토록 볼품없게 짓지 않았다. 단층으로 지어진 회색빛의 직육면체 건물은 집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물류창고나 비행기 격납고를 연상시켰다. 깔끔하게 지어진 건물이긴 했지만, 집주인이 소유하리라 추정되는 엄청난 재산에 비하면 저택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전 세계 0.001퍼센트라는 슈퍼 리치의 대저택이 내심 궁금했던 승원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건물 외관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게다가 집이라면 으레 남쪽을 향해 나 있어야 할 창문이나 그럴싸한 통유리창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창을 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갑부들은 가진 게 많은 만큼 감출 것도 많았으니까. 그러고 보니 집보다는 오히려 요새에 가까운 인상을 주는 건물이었다. 32번 국도를 벗어나 이곳에 오기까지 울창한 숲길을 두 시간 이상 달려온 데다 정문에서 건물까지 약 5킬로미터에 달하는 진입로가 온통 삼나무와 편백나무에 둘러싸인 걸 고려하면 이런 추측이 전혀 틀리지만은 않을 터였다. 온갖 기행을 일삼는 괴짜 억만장자라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승원은 집주인이자 P2P 대출회사 'Pooma-E'를 세계 일류 핀테크 기업으로 성장시킨 송우만 회장이 어떤 부류의 인간일지 몹시 궁금했다.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부호 100위에 수년째 이름을 올린 그가 왜 지방 소도시의 이름 없는 변호사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10년 전 대중의 관심에서 연기처럼 증발해 2만 제곱미터는 족히 넘는 요새에 틀어박혀 살던 사람이 왜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을 만나자고 했을까?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에 반쯤 걸터앉은 그의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거렸다.
항공기 조종사를 연상케 하는 단정한 남색 슈트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운전사가 현관 앞에 메르세데스 벤츠 EQS를 부드럽게 세웠다. 승원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재빨리 뛰어나온 운전사는 반대편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말릴 틈도 없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익숙하지 않은 환대가 몸통을 조여왔다. 승원은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격식을 차려 당당하게 내리지도 못한 채 어정쩡한 자세로 최고급 전기 세단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그의 낡은 클래식 페니 로퍼가 바닥에 닿자 ‘사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낯선 감촉이 발바닥을 통해 온몸에 전해졌다. 제주도 화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송이(화산석 알갱이)였다. 공식적으로 제주도 이외 지역으로 반출이 엄격히 금지된 품목이었다. 천문학적인 재산을 가진 송 회장은 마음만 먹으면 서울 한복판에 한라산도 옮겨올 수 있는 인물이었다. 고작 붉은 송이 정도야 왼쪽 주머니에 든 지갑을 오른쪽 주머니에 옮기는 일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옛말이 된 지 오래였다. 돈만 있으면 염라대왕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망자도 불러올 수 있는 시대였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부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빅 데이터, 인공지능, 핀테크, NFT 등 빅 테크 기술을 선점한 극소수 기업이 전 세계 부를 독점했다. 그들 중 일부는 아직 정비되지 않은 법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이미 꽉 찬 비밀금고의 지붕을 뚫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쌓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이 그들의 발밑에 쌓였다. P2P 대출 서비스로 걸음마를 뗀 스타트업을 일약 세계적인 금융 기업으로 성장시킨 송 회장도 예외일 리 없었다. 승원은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이 세상에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는 없다는 사실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가 아무리 정의를 강조하고 법 조항을 들이밀어도 돈 앞에서는 번번이 쓴맛을 경험했다. 승원에게 돈은 언제나 악마의 얼굴로 다가왔다. 돈과 야합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글로 풀어내면 10권은 족히 넘는 대하소설이 될 거라고 농담처럼 말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순간 승원은 가슴을 조여 오는 통증을 느꼈다. 불규칙한 생활이 그에게 훈장처럼 준 역류성 식도염이었다. 어쩌면 썩은 내가 진동하는 돈에 대한 본능적인 적대감일지도 몰랐다. 승원이 혼자 만들어낸 허상과 싸우느라 잠시 주춤하는 사이 햇빛에 반짝이던 은회색 자동문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소금쟁이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그러자 우아한 황갈색 개버딘 정장을 입고 검은 안경테 너머로 눈매가 날카로운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집은 작고 가냘프지만 야무져 보였다. 전형적인 미인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검게 그은 피부가 매력적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 변호사님. 제가 연락드렸던 서현주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송우만 회장님께서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오승원입니다. 하도 끈질기게 요청하시길래 오긴 왔습니다만, 도대체 왜 억만장자 회장님께서 이름도 없는 촌구석 변호사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지 당최 모르겠습니다. 그룹 내에 정부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법률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녀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턱을 서너 차례 위아래로 움직였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었지만, 검은 눈동자는 무표정에 가까웠다.
“마땅한 지적이십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먼 곳까지 모신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회장님께서 모든 걸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그전에 한 가지 당부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보고 들은 이야기는 어떤 경우에도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약속하실 수 없다면….”
“이래서 제가 당신들 같은 부류의 인간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 거예요. 당신, 아니 송 회장님은 세상 참 편하게 사시네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약속부터 하라니요. 변호사로서 전 의뢰인의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않습니다. 그건 약속의 문제가 아니라 직업윤리에 관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당신들이 만약 불법을 저지르고 그걸 무마하려고 시도한다면 제가 먼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동의한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회장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흠, 내 말이 그렇게 들렸나요? 아무튼 당신이 제대로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도대체 누가 억만장자의 집을 이렇게 엉망으로 지었답니까?”
그녀는 손목에 찬 작은 시계를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작은 시침과 분침이 오밀조밀하게 돌아가는 클래식 손목시계였다.
“회장님께 여쭤보시죠. 그분께서 직접 설계하셨으니까요.”
“아, 그래요…. 암튼 괴팍한 늙은이인 것만은 틀림없군.”
“혼잣말은 혼자만 들을 수 있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 변호사님.”
“제 혼잣말을 가로챈 건 당신인걸요. 아, 농담입니다. 노력해 보도록 할게요.”
“서두르시죠. 회장님은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답니다.” <다음 편에 계속>
<이미지 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