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한 스파이. Chapter 2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5년 8월

by 조이홍

Chapter 2


탕탕탕!

세 발의 9mm 탄알이 닥터 볼턴의 심장에 무심히 날아가 꽂혔다. 더블 엑스는 재빨리 달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그를 일으켜 안았다. 마지막 숨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거칠었다. 세상을 향해 쓴소리를 뱉어내던 악당의 잔혹한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던 생태학자의 온화하지만 슬픈 얼굴이 그녀 눈앞에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함께 지구를 위해 올바른 길을 찾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아주 잠깐 더블 엑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불규칙하게 들려오던 거친 숨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내가 틀린 걸까, 더블 엑스, 아니 로이스?”

“말하지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

“큭! 쿨럭쿨럭. 이런 결말도 나쁘진 않군. 질문을 바꿔 보지. 당신이 구원한 건 지구일까, 아니면 나일까….”

닥터 볼턴의 불규칙한 숨소리가 비로소 멈췄다. 더블 엑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녀는 최고의 스파이답게 또 한 번 크나큰 위험에서 지구를 구했다. 아울러 수많은 사람의 목숨도 지켰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누군가 위협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터였다. 매일 뜨거워지는 지구를 눈치채지 못하듯이. 익숙한 일상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다음 날도 계속되리라. 더블 엑스는 싸늘하게 식은 닥터의 주검과 나노 입자로 가득 찬 팰컨 12 로켓의 발사 버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질문이 잔잔한 호수에 던진 조약돌처럼 수많은 동심원을 그리며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이 지켜낸 것이 정녕 지구의 평화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지구는 해마다 뜨거워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뭄과 홍수가 번번이 많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태평양 어딘가에 거대한 섬을 만들고, 미세 플라스틱에 중독된 물고기들이 식탁 위에 올랐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열대우림을 불태워 들어선 거대 농장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마리의 소들이 도축되었다. 지구 한 편에서는 포장도 뜯지 않은 음식이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다른 한 편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음식 찌꺼기라도 구하려고 쓰레기통을 뒤졌다. 진보주의자들은 세상은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졌다고 큰소리쳤는데, 모두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었다. 올해 여름은 역사상 가장 더운 계절로 기록되리라 언론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연례행사처럼 매년 반복하면서 마치 처음인 양 흥분했다. 순간 정신이 아뜩해진 더블 엑스의 몸이 휘청했다. 그때 그녀의 스마트 글라스에 내장된 음성 송수신기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 들어도 스테인리스 같은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임무를 완수했군. 더블 엑스. 축하하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윗선에서 트리플 엑스 요원을 파견하겠다는 걸 말리느라 진땀 꽤나 흘렸다네. 그 친구는 너무 요란해서 은밀하게 해결할 임무에는 어울리지 않거든. 아무튼, 자네라면 꼭 해낼 줄 알았네.”

“감사합니다, Q.”

“곧 현장 요원들이 도착해 마무리할 걸세. 자네는 다음 임무를 위해 대한민국 환경 수도 한울로 가게. 선선한 그곳에서 한숨 돌리고 있으면 다음 지령을 내릴 걸세."

“네, 알겠습니다.”

“참, 닥터 볼턴의 나노 입자 핵심 기술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은 확보했나?”

“네, 마침 폐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네. 계획이 변경되었어. 나도 입자 기술을 검토하라는 VIP 지시가 있었네. 우리 측 요원이 조만간 자네를 찾아갈 걸세.”

“이 기술이 선량한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으니 폐기 처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 검토한다니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VIP 명령일세. 자네나 나나 국가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네. 더 이상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네.”

더블 엑스의 굳게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스마트 글라스의 음성 송수신기 전원을 지그시 눌렀다. 방금 떠오른 생각 하나가 머리에서 뱅뱅 돌며 그녀를 괴롭혔다. ‘닥터 볼턴이 틀린 걸까, 우리가 옳은 걸까, 정말 우리가 항상 정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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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비밀 요새를 유유히 빠져나온 더블 엑스는 숲 속에 감춰둔 자신의 2025년형 BMW iX 운전석에 기대앉았다. 메타 물질 소재로 특별 제작한 차체는 빛뿐만 아니라 전자파, 음파 등을 차단하는 스텔스 기능이 있지만,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불볕더위는 막아내지 못했다. 차량 통제 AI가 운전자를 인식하더니 재빨리 에어컨을 가동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흘리지 않던 굵은 땀방울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냉기를 만나자 비로소 멈췄다. 더블 엑스는 차 안에 마련된 안전함에 마이크로필름을 넣었다. 이제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안전함을 열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강제로 열려고 시도하면 내용물은 700도가 넘는 고온에 순식간에 재로 변할 터였다. 더블 엑스는 이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동 주행 모드로 전환한 그녀는 시트에 기댄 채 선루프를 통해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에 몸을 맡겼다. 잘빠진 전기차가 굽이굽이 산길을 미끄러지듯 질주했다. 2000년대 초반 크게 유행하던 팝 사운드가 돋보이는 힙합 음악이 하만카돈 오디오를 들썩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서 시뻘겋게 이글거렸다. 한여름의 땡볕을 온몸으로 받아낸 아스팔트가 곰돌이 젤리처럼 흐물거렸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석 달째 계속되었다. (끝)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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