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한 스파이. Chapter 1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5년 8월

by 조이홍

Chapter 1


마지막 무장 경호원 두 명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더블 엑스는 마침내 닥터 볼턴과 마주 섰다. 그의 심장을 겨냥한 라이언 하트 LH9의 짧은 총신이 미세하게 떨렸다. 냉혹한 킬러라는 그 세계 별명에 걸맞지 않은 행동에 스스로 놀란 더블 엑스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수천만 명의 생명이 그녀의 손끝에 달려있었다. 추억은 뉴런에서 생성되는 CPEB3이라는 특정 단백질에 의해 윤색된 환영에 불과할 터였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울부짖을 만큼 고통을 견디며 사적인 감정이 임무에 개입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정의의 이름으로 수많은 악의 뿌리를 제거한 그녀였다. 치명적인 그녀의 무기들은 감정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닥터 볼턴도 인류를 위협하는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일 뿐이었다. 자비를 베풀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철썩거리는 파도에 자꾸만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조금씩 무너지는 마음을 견디기 버거웠다. 한때 사랑했던 연인이자 존경했던 스승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스마트 글라스를 통해 본부에 그대로 송신되고 있었지만 그건 상황이 해제되고 난 후 걱정할 문제였다.

“제발 그 버튼에서 손 떼요, 닥터 볼턴.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잘 알잖아요.”

더블 엑스는 자꾸만 떨리는 총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LH9의 작은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더욱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멈추면 당신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겠어요. 제발 멈추세요.”

발사 버튼에서 시선을 거둔 닥터 볼턴이 더블 엑스를 응시했다. 그의 메마른 눈빛에서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이스, 아니 이제 더블 엑스라고 불러야 하나? 당신이라면 내 이상에 공감해 주리라 믿었는데, 배부른 돼지들의 사냥개 노릇이나 할 줄이야….”

“전 그저 선량한 사람들이 온전한 일상을 누리도록 도울 뿐이에요. 그러니 그만 버튼에서 손을 떼요. 당신도 도움받을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라는 게 돈 많은 나라의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가들과 그 바보들을 뽑는 유권자들을 의미하는 거잖소? 협잡꾼들에게 놀아나 하나뿐인 지구를 이따위로 망가뜨린 장본인들이지. 진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질끈 눈감아 버렸지. 모두 한통속이야. 기회가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자신들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폐기 처분하려고만 들지. 내 아내도 결국 당신들이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분명 그건 사고였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제가 직접 그 사건을 재조사할게요. 약속해요.”

“그런다고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테지. 아내가 죽은 10년 전 그날 내 삶의 시계도 멈추었소. 그녀를 뒤따르리라 마음먹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소. 내가 왜 지금까지 사지가 찢겨나갈 듯한 고통을 견디며 지옥보다 못한 삶을 살아왔는지 아시오? 아내가 끝내지 못한 연구를 내 손으로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오. 이제 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내 기나긴 고통도, 뜨거운 지구의 고통도 끝낼 수 있소.”

두 손을 꼭 움켜쥔 보람도 없이 LH9의 총신이 자꾸만 흔들렸다.

“우…, 움직이지 말아요, 닥터 볼턴!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해 줘요. 제 말 잘 들어요. 당신 아내의 가설은 완벽하지 않아요. 그 나노 입자들이 성층권에 뿌려지면 대기가 어떤 연쇄 반응을 일으킬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요. 많은 사람이 완벽하지 않은 가설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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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아요, 더블 엑스, 피나투보 화산 대폭발을 기억할 거요. 연기 속에 포함된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흩어져 황산 에어로졸로 변해 태양열을 반사한 덕분에 기온이 일시적으로 내려가지 않았소? 이 사건에서 착안한 아내의 '성층권 에어로졸 주입' 가설이 옳았다는 걸 지난 10년 동안 행했던 수많은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소. 지름이 5백만 분의 1센티미터인 나노 입자들을 대기의 상층에 살포하면 햇빛을 다시 우주로 반사해 뜨거워진 지구를 식힐 수 있소. 당신도 이 실험으로 온도가 낮아졌다는 유의미한 데이터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소?”

“그 데이터는 지극히 협소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일 뿐이에요. 완벽하지 않다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북미 대륙과 유럽의 하늘을 통제 불가능한 나도 입자들로 가득 채우려고 하잖아요. 이건 지구와 인류를 대상으로 한 정신 나간 도박에 불과하다고요.”

꿈꾸는 듯 반짝이던 닥터 볼튼의 눈빛이 순식간에 광기에 휩싸였다.

“날 모나리자에 케이크나 던지는 미치광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지난 수십 년간 아내와 내가 피땀 흘려 연구한 나노 입자 기술이 미친 도박이라고요? 하하하. 옛 스승을 모욕할 의도였다면 꽤 성공적이었소. 지난 이백 년 동안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를 태우며 대기를 온실가스로 가득 채운 장본인들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 몰랐소. 광란의 도박으로 자신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이제 겨우 먹고살 만해진 국가들한테 이산화탄소를 줄이자며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강요하는 이중인격자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지구가 너무 뜨거워졌으니 다 함께 노력하자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 매년 배출되는 수백억 톤의 온실가스 중 가난한 나라들의 몫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면서? 문제는 정작 자신들이 일으키고 책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우리한테 떠넘기려 하지 않았소? 당신들이 대기 중에 퍼질러 놓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어린아이들 입에 들어갈 거친 빵 한 조각까지 줄여야 했소. 아내가 시작하고 내가 마무리한 '태양 복사 관리 기술(Solar Radiation Management)'을 응용한 나노 입자는 우리 레노아 국민이 흘린 피눈물의 결과란 말이오. 고맙다는 인사는 못 할망정 정신 나간 도박이라니!”

거대한 광기에 휩싸인 미치광이가 아니더라도 과학자를 설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더블 엑스도 잘 알았다. 갑자기 정체 모를 한기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15년 전 발표한 논문에서 당신도 SRM 기술로 인해 성층권 대기가 오염될 수 있다고 지적했잖아요. 나노 입자가 광범위하게 두 대륙의 대기를 덮으면 지구가 식는 정도가 아니라 빙하기가 올 수도 있고요. 설령 빙하기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 지역에 사는 수많은 사람이 예상치 못한 기후 변화로 피해를 볼 수 있다고요. 과학자는 오직 경험적 합리주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강의하던 모습이 제 눈에는 아직도 생생해요. 아내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과학자로서 양심도 저버리신 건가요?”

“과학자의 양심? 과학에 마침표란 없는 법이오. 그저 쉼표만 있을 뿐. 난 앞으로 나아갈 뿐이오. 우리 모두의 지구를 구하려면 희생은 불가피하오. 그 희생이 가난한 국가들 몫일 때는 자선 모금 몇 번으로 대신하더니 당신들 차례가 되니 악당으로 몰아붙여 총구를 겨누는군요. 그것 참 편안한 발상이오. 이 버튼을 누르는 게 과학자로서 내가 할 임무요. 이제 당신들의 화려한 파티는 끝났소. 그럼….” (다음 편에 계속)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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