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6년 4월
입구에 들어서자 승원은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했다. 떡 벌어진 입에 잘 여문 늙은 호박 하나는 거뜬히 들어갈 듯했다. 마치 울창한 숲의 비밀스러운 입구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외관상 단층이었던 건물은 안으로 들어오자 층높이가 20미터는 족히 넘는 드넓은 공간으로 변했다. 전체 면적이 얼마나 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짐작컨대 축구장 30개쯤은 족히 들어가겠다 싶었다. 지상에 드러난 건물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기능은 떨어지지만 임무에 충실한 구형 로봇 청소기 한 대가 겨우 지나갈 만한 통로를 제외하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 모습 그대로였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와 천남성, 둥글레, 새우난과 같은 몇몇 눈에 익은 나무와 식물을 제외하면 이름도 모르고 본 적도 없는 나무들과 양지식물들이 빽빽하게 숲을 이루었다. 성격 괴팍한 노인네는 취향도 별나다고 승원은 또 혼잣말했다. 다행히 서현주는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거대한 식물원이 딱히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는 고상한 척하면서 뒤로는 온갖 변태적인 행위를 일삼는 속물들에 비하면 송 회장은 훨씬 인간적인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승원은 잠깐 생각했다.
“입구에서 입장권 구매하는 걸 깜빡한 것 같은데요?”
“네? 아…, 오 변호사님이 유머 넘치는 분일 줄 몰랐네요. 회장님은 숲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신답니다.”
“그러시겠죠. 척 보면 알겠는걸요. 그나저나 길 잃은 건 아니죠? 대피소는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건가요?”
그녀는 승원의 아재 개그가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회장님은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특별히 마련된 공간에 계십니다. 이제 다 와 갑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참, 오늘 만남이 안 좋게 끝나더라도 나갈 때 한 번 더 수고 부탁드립니다. 이 나이에 또 미아가 되고 싶지는 않아서요.”
미로처럼 복잡한 숲길을 지나자 마침내 탁 트인 커다란 방이 나왔다. 통유리창으로 따뜻한 봄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억만장자의 방이라 각별히 신경 쓴 티가 역력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숲은 마치 검은 비단을 휘두른 듯 울창했다. 벽면 한쪽으로는 거대한 담수 수족관이 보였다.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열대어 대신 열목어나 어름치, 쉬리 같은 민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헤엄쳤다. 그리고 한 남자가 말없이 침대에 기대앉아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숱이 풍성한 갈색 머리와 눈처럼 하얀 피부가 시선을 끌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인색하다고 해야 할지 냉철하다고 해야 할지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눈빛만큼은 스무 살 청춘처럼 불타올랐다. 팔뚝에 꽂은 굵은 주삿바늘만 없었다면 환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매도 다부졌다. 승원은 송 회장에게서 상대를 압도하는 기운이 뿜어져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승원 변호사입니다, 회장님.”
서현주는 마치 메타버스에 처음 접속한 이용자에게 사용 방법을 설명하는 NPC 캐릭터처럼 친절하지만 건조한 목소리로 승원을 소개했다. 오래전부터 기다린 사람 얼굴치고는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송 회장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하오. 오 선생. 의뢰인이 찾아가는 게 도리나 보시다시피 늙은이가 거동이 불편해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넓은 방에 낮게 깔렸다. 송 회장은 시간에 쫓기는 사람처럼 말과 말 사이에 여백이 없었다.
“저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시는걸요. 피부도 고우시고요.”
“허허허, 마음에 없는 말도 다 하고 오 선생은 참 예의 바른 젊은이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무척 다행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저를 왜….”
송 회장이 자신의 비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뜨며 말했다.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회장님.”
송 회장의 시선이 다시 승원을 향했다. 이번에는 봄나비의 날갯짓처럼 부드러운 동작과 함께였다.
“자리에 좀 앉으시오, 오 선생. 궁금한 게 많으리라 짐작합니다만 우선 내 이야기부터 들어주시오. 늙은이들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은 법이니까.”
승원은 침대와 2미터 정도 떨어진 고급스러운 원목 의자에 반쯤 걸터앉았다. 화려한 유선형 등받이에 나뭇결이 고스란히 드러난 가구는 나무로 만든 의자가 불편하다는 편견을 한 방에 날려주었다. 반듯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승원은 말없이 송 회장을 바라보았다.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이 집이 마음에 드시오, 오 선생?”
“아, 이 식물원 말인가요? 나무 구경이나 시켜 주려고 절 부르신 건 아닐 텐데요.”
“귀는 친구를 만들지만 입은 적을 만들지요. 우리 둘 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니 마음을 넓게 가집시다. 어떻소, 오 선생?”
5월의 청보리밭에 부는 산들바람 같은 음성이 방안에 낮게 깔렸다. 그 목소리는 마치 뾰족한 가시투성이 자식을 달래는 다정한 아버지의 그것처럼 들렸다. 상대를 제압하던 강한 기운이 누그러지자 승원의 움켜쥔 주먹이 저절로 펴졌다. 어찌나 꽉 움켜쥐고 있었던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회장님.”
송 회장이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가끔 어딘가에서 윙윙거리는 기계 진동음이 들리긴 했지만, 승원은 짧은 침묵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배부른 세 발가락 나무늘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겹게 눈을 뜬 송 회장이 침묵의 바다에 묵직한 돌 하나를 던졌다.
“이미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집은 평범하게 지어지지 않았소. 식물원이라는 비아냥이 썩 틀린 말도 아니지. 제주도에 있는 오름 하나를 통째로 옮겨온 셈이니까요.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숲이지요. 이곳은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1년 내내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었소. 웬만한 충격이나 열에도 거뜬하지요. 자꾸만 뜨거워지는 지구가 언제 인류에게 호된 회초리를 날릴지 모르니 대비가 필요하지 않겠소? 어떤 자연재해가 닥쳐도 견딜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었다오.”
“그런 숲이 한 곳뿐이라니 애석하네요. 여러 곳이라면 더 많은 숲을 보호할 수 있었을 텐데요.”
“추억은 하나뿐이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오. 되도록 많은 동식물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을 만들었으니 말이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에겐 시간이 많지 않소.”
승원은 손목에 찬 애플 워치를 슬쩍 쳐다보았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계속 깜빡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전파를 차단한 모양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승원은 송 회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많지 않으시다면서 이야기가 겉도는 듯한 기분은 제 착각일까요?”
“그렇다면 용서하시오, 용감한 젊은이. 난 지구의 미래에 관심이 아주 많소. 오 선생께서 나에 관해 공부를 좀 했다면 내가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돈을 후원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만.”
“물론입니다. 다만 세금 감면이나 기업 홍보 차원에서 관심 두는 척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많은 기업이 그러니까요. 회장님을 오해했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사과는 넣어두시오. 처음에 그런 의도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테니. 기업을 경영하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라오. 하지만 이 일만큼은 진심이었소. 너무 뻔한 이야기라 믿지 않을 테지만,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오. 바짝 말라죽은 북극곰 사진이었소. 끔찍하긴 했지만 살면서 더 참혹한 장면도 많이 봐왔던 나였소. 그런데 그 사진을 본 이후로 이상하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소. 가슴이 답답해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오. 그때 깨달았소. 가만히 있으면 북극곰 한 마리로 끝나지 않으리란 걸. 그래서 결심했소. 그런 불행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해결책을 찾기로 말이오.”
“회장님의 진심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제가 여기 온 이유와 무슨 상관이 있죠?”
목이 마르는 듯 송 회장은 침대 옆에 나란히 놓인 원목 탁자 위 컵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그 모습이 마치 기억나지 않는 다음 대사를 자연스레 떠올리려는 연극 무대 위 노련한 배우처럼 보였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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