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Chapter 3

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6년 4월

by 조이홍

Chapter 3


목이 타는 듯 송 회장은 침대 옆에 나란히 놓인 원목 탁자 위 컵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그 모습이 마치 기억나지 않는 다음 대사를 자연스레 떠올리려는 연극 무대 위 노련한 배우처럼 보였다. 어느새 물 한 잔을 비운 송 회장의 시선이 한가로이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쫓았다. 승원은 그 눈빛에서 어린 손자를 바라보는 다정한 할아버지의 온기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어쩌면 송 회장은 자신이 상상한 것만큼 악당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지난 10년 동안 기후 변화를 늦출 방법을 찾아 온갖 노력을 했다오. 정말 많은 전문가를 만났지. 태양열과 풍력을 활용하는 재생에너지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 온난화의 주범인 이산화탄소를 포집하고 활용하고 저장하는 기술이나 햇빛 반사 등을 통해 태양 에너지의 양을 조절하는 기술, 플랑크톤과 녹조류의 광합성 작용을 활용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바다에 저장하는 기술 등 다양한 방법을 연구했소. 처음에는 꽤 고전했지만, 그 기술들은 나름대로 진전을 보였소. 그런데 그만 지구의 병을 고치려다 내가 몹쓸 병에 걸리고 말았소. 저 위에 계신 분이 당신의 큰 뜻을 거역하려는 내게 뿔이 단단히 난 모양이오. 얼른 올라오라고 어찌나 성화던지.”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위로는 사양하겠소. 내 나이쯤 되면 죽음과 언제라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이라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우리 인간은 불멸에 닿지 못했으니 말이오. 아무튼 내가 계획보다 빨리 떠나게 되어 문제가 좀 생겼소. 오 선생이라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모시게 되었소.”


승원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억만장자 괴짜 노인의 말을 재빨리 머릿속으로 되짚었다. 정, 재계 인사들이 그에게 줄을 대려고 갖은 노력을 한다는 소문은 증권가 찌라시 단골 소재였다. 그가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지가 경제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끼쳤다. 그의 말 한마디에 증시가 출렁거렸다. 1년에 단 한 차례, 그와 아침 식사하며 두서너 시간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주어지는 자선 경매 이벤트는 낙찰 금액이 상상을 초월했다. 누구나 만나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송우만 회장이 눈앞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번에는 승원이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을 느꼈다. 시원한 물 한 모금 마실 수 있다면 당장 메피스토와도 계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마침 서현주가 검게 옻칠한 나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원목 탁자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도자기 찻주전자와 얼음이 잔뜩 들어 표면에 흘러내리는 물방울에 당장이라도 얼굴을 들이대고 싶은 크리스털 찻주전자를 함께 내려놓았다.

“차부터 한잔하시지요, 오 선생.”

“아무래도 오 변호사님은 실내가 좀 더울 것 같아 시원한 차를 함께 준비했습니다.”

딱히 무얼 마시겠다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승원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승원은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어두고 서현주가 건네준 빛깔 고운 녹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여름 무더위를 씻어주는 소나기처럼 시원하고 향긋한 풍미가 입안에 번지자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자 괴짜 억만장자에게 굳게 걸어두었던 마음속 빗장이 스르륵 풀려나갔다.

“회장님의 진심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낱 시골 변호사인 제가 회장님을 도울 수 있다는 말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군요. 제게 진짜 원하시는 게 무언가요? 그리고 왜 하필 저인가요?”

“왜 오 선생이냐는 질문에 관한 답은 매우 간단하오. 오 선생이 나와 비슷한 인간이기 때문이오. 괴짜, 꼴통, 외골수 뭐라고 부르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일단 옳다고 믿으면 남 눈치 보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죠. 나도 오 선생에 대해 공부를 좀 했다오. 학생 때 참여한 ‘도롱뇽의 친구들’과 대운하 반대 활동부터 원전 폐기 운동, 가리왕산 복원 운동, 4대강 복원 운동,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운동, 그리고 정부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주도한 30억 그루 나무 심기 반대 운동까지 다양한 분야의 환경운동에 목소리를 냈죠. 게다가 법률가로서 자연도 인간과 똑같이 법인격을 부여하자는 지구 중심주의 법철학으로 많은 환경단체의 지지를 얻기도 했지요. 물론 그보다 많은 건설업자와 개발 찬양자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말이오. 어떻소, 오 선생에 관해 공부한 내용이 마음에 드시오?”

정보의 양극화 시대였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름 하나만으로도 어디서 무얼 사고 무얼 보고 무얼 먹는지 빅 데이터라는 명목으로 언제라도 정보가 노출될 위험에 처했다. 반면,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들의 정보는 철저하게 은폐되었다. 검색창에 오승원이라는 이름만 입력해도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낱낱이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학창 시절에 활동했던 내용까지 꿰뚫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참 잘했어요,라고 써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지만 환경운동을 주도한 변호사를 일렬로 세우면 아마 저는 맨 뒤에 서 있을 겁니다.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훌륭한 변호사나 환경운동가를 원하는 게 아니라오. 말하지 않았소,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을 원한다고. 신념을 따르고 절대 타협하지 않는 괴짜 같은 사람, 그게 중요하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직 악당일 때 우리 사이에 악연이 하나 있었소. 아마 오 선생도 기억할 거요. 미니 신도시로 조명받던 푸릉 지구 개발 건 말이오. 한 풋내기 변호사가 환경 평가로 발목을 잡아 2년이나 지체되었지. 외부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투자한 회사의 자금이 상당히 투입된 터라 애를 좀 태웠소. 당시 지자체와 시행사가 매달려 풋내기 변호사를 구워삶으려 했지만, 잔뜩 허탕만 쳤다고 들었소.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는 인간이 배포만 두둑하다고. 물론 난 그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소. 아무튼, 그 정도 깜냥은 돼야 이번 일을 맡길 수 있다고 판단했소.”

circus-990273_1920.jpg

승원은 10년도 더 된 일이지만 그때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고아원 출신으로 지방대를 졸업하고 마지막 사법고시를 턱걸이로 합격했다. 연수원 성적도 어정쩡한 데다 연줄도 없던 터라 판검사나 대형 로펌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어릴 때 자랐던 푸릉으로 내려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지만, 변두리 시골 동네라 송사가 많지 않아 겨우 밥벌이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환경운동가로 일하는 고등학교 단짝 친구의 부탁으로 푸릉 지구 개발 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 되지 않았지만, 환경 평가서에 허술한 점이 발견되었다. 모르면 몰랐지, 알고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행정 소송을 걸었다. 개발 사업에 제동이 걸리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초등학교 동창생부터 이름도 가물가물한 연수원 동기까지 연락 한번 없던 이들이 온종일 휴대전화를 울려댔다. 밥 한 끼 하자는 사람이 줄을 섰다.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거친 경고도 있었지만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평생 먹고살 길을 열어주마 약속했다. 실제로 사과 박스에 돈다발을 채워 온 사람도 있었다. 구린 냄새가 풍겼다. 승원은 눈을 크게 뜨고 더 깊게 들여다보는 쪽을 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자신에게 쪽팔리고 싶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승원은 꼴통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환경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푸릉 지구 개발 건이 송 회장과 닿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그런 악연을 인연으로 품으려는 송 회장의 비범함에 반쯤 풀린 빗장이 마침내 활짝 열었다. 그는 남아 있는 찻잔을 마저 비우고 그림책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오 선생께 부탁한 일은 날 대신해 세상이 온통 떠들썩해질 만한 쇼를 맡아달라는 것이오.”

“네? 갑자기 쇼라니요?”

“단순한 쇼가 아니오. 내 죽음으로 완성되는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위대한 쇼라오. 지구 온난화를 늦추기 위한 해결책을 찾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소. 문득 엉뚱한 생각 하나가 떠올랐소. 지구가 뜨거워지는 건 모두의 책임인데 왜 일부 과학자들이나 환경운동가들만이 어떻게 해보려고 죽도록 노력하는지 말이오. 물론 일부 깨어 있는 시민들은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고 사용하지 않는 가전제품의 전원 플러그를 뽑아두기도 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플로깅을 하고, 아직은 불편한 전기차도 애용했지만, 대다수 사람은 기후 변화가 절대 오지 않을 미래처럼 방관했지요. 난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이 지구를, 아닌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소. 그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었소. 내가 연출하고 오선생이 진행한 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멋지지 않겠소? 원래 사람은 남의 말이나 잔소리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법이니 스스로 나설 수 있는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말이오. 어떻소,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소?"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생기 가득 싱그러웠다. 일부러 그렇게 느껴지도록 짜내기라도 한 듯이 단어 하나하나에 열정이 담겼다. 승원은 어떻게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의 눈이 밤하늘의 별처럼 밝고 활기 넘쳤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았다. 송 회장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자기 죽음마저 기발한 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삶은 얼마나 찬란했을까. 승원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솟구쳐 오르는 걸 느꼈다. 다른 이에게서 처음 느끼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조용히 원목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송 회장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손을 한 번 잡아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늙은이의 볼품없는 손도 괜찮다면. 어떻소, 이제 내 제안을 받아주겠소?”

“회장님의 마지막 여정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고맙소. 오 선생이라면 날 도와주리라 확신했소. 자세한 사항은 서 비서가 안내해 줄 것이오. 이제 좀 쉬어야겠소. 오랜만에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해서. 또 봅시다, 오 선생. 안녕히 가시오.” (다음 편에 계속)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전 06화위대한 유산. Chapter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