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6년 4월
송 회장의 유언장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외신들은 괴짜 억만장자의 기상천외한 유언 내용을 앞다퉈 보도했다. 죽음을 한 편의 드라마로 연출한 고인에게 찬사가 뒤따랐다. 유언장 공개 직후부터 아마존과 알리바바에서 한국의 호미와 곡괭이가 불티나게 팔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내로라하는 보물 사냥꾼들도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편 국내 언론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또다시 두 진영으로 갈렸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지나치게 부풀려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다는 목소리와 고인의 유언을 계기로 기후 변화에 실질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맞섰다. 그런가 하면 ‘괴짜 엉망장자가 전 국민을 사행성의 늪에 빠뜨린다'는 한 보수 언론의 조롱 섞인 사설도 눈길을 끌었다. 안타깝게도 대중은 기후 변화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누가 비밀 열쇠를 찾아 거액을 상속받느냐에 관심이 쏠렸다. 두 번 연속으로 벼락 맞을 확률보다 희박한 가능성에 모든 걸 걸고 유언장이 공개된 지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벌떼 같은 인파가 상남평야로 몰려들었다.
5개 시와 3개 군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상남평야에 이르는 고속도로와 국도는 장마를 피해 집을 옮기는 개미 떼처럼 셀 수없이 많은 자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남북 80킬로미터, 동서 50킬로미터에 달하는 약 18만 5000헥타르 논밭에는 호미나 곡괭이를 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화석 연료를 사용해 열쇠를 발견하면 세 번째 유언은 자동 폐기된다는 내용이 추가로 공개되면서 금속 탐지기나 적외선 탐지기, GRP 탐사기 등의 사용이 전면 제한되었다. 조명을 사용하는 야간 활동도 금지되었다. 미리 태양 전지를 준비해온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참가자들은 해 뜨는 시간부터 해 지는 시간까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오직 자신의 근력으로 땅을 갈아엎었다. 한 크리에이터가 올린 ‘억만장자 되는 실전 호미질’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하자 비슷한 내용의 콘텐츠가 유튜브를 도배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풍수지리에 밝은 무속인이라고 소개한 한 중년의 유튜버는 망자와의 선문답을 통해 비밀 열쇠가 묻혀 있는 장소를 알아냈다며 무려 열 곳의 좌표를 연작으로 공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이나 문화 인류학자들은 이번 사건을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1849년부터 1853년까지 일어났던 ‘골드러시’에 비견했다. 왕이나 귀족들만 차지했던 황금을 평범한 사람들도 소유할 수 있다는 믿음이 당시 미국 사회 발전을 견인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상남평야러시’가 우리 사회 전반에 끼칠 영향력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몇몇 보수 색채를 띤 정치평론가들은 억만장자가 남긴 괴팍한 쇼가 대중의 탐욕에 기반한 기형적 포퓰리즘이라고 저격했다. 일부 방송사들이 이들의 발언을 뉴스 시간마다 반복적으로 보도해 여론을 자극하기도 했다. 한 억만장자의 죽음으로 쏘아 올린 공 하나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설상가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대중의 관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스무날이 지나도록 열쇠가 발견되지 않자 그간 남의 일이라 여겼던 이들까지 상남평야로 질주했다. 발 빠른 한 지역 여행사는 공해가 전혀 없는 전기버스를 활용해 상남평야 일주 패키지 상품을 내놓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평균을 웃도는 고온으로 아직 여름이 한참 남았는데도 사람들은 반바지와 반팔 차림으로 흙구덩이를 뒹굴었다. 뽀얀 피부를 자랑하던 도시의 젊은이들이 햇볕에 까맣게 그을려 진짜 농사꾼처럼 보였다. 자외선 차단제를 아무리 덕지덕지 발라도 뜨거운 햇볕을 완벽하게 피할 방법이 없었다. 괴짜 억만장자의 진짜 속내는 전 국민을 농부로 만드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기까지 했다. 마감 기한을 하루 앞두고는 주최 측 추산 3백만 명, 경찰 추산 백만 명이 새벽부터 상남평야 일대를 가득 채웠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뒤늦게 도착한 이들은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참가자들은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 흙을 갈아엎었다. 시원한 소나기라도 퍼부어주면 좋으련만 심술궂은 태양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잔인하리만치 뜨거운 5월이었다. 내리쬐는 불볕더위 속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일부 참가자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대다수 참가자들은 최후의 1초까지 호미질을 늦추지 않겠다며 마지막 의지를 불살랐다. 어스름 저녁 무렵, 자정을 기해 송우만 회장 법률 대리인의 대국민 담화가 있으리라는 기사가 속보로 떴다. 사람들은 가져온 호미나 삽, 곡괭이를 챙겨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어떤 이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해대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함께 온 아이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손톱 달이 가느다란 실눈을 뜬 검은 고양이처럼 세상을 나른하게 내려다보았다.
공중파 3사가 합동으로 중계하는 대국민 담화에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송우만 회장이었다. 생전 녹화분이라는 커다란 자막을 보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망자가 살아 돌아와 기절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10년 동안 대중의 시선에서 사라졌지만, 조금도 늙지 않은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돈의 힘을 실감했다. 얼굴에 개구쟁이 같은 장난 섞인 기색이 가득한 괴짜 억만장자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송 우만이올시다. 지난 한 달 동안 괴팍한 노인네가 준비한 마지막 쇼를 마음껏 즐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온종일 뙤약볕에서 흙을 갈아엎는다는 게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테죠. 특히 도시에서 나고 자란 분들은 꽤 고생하셨으리라 짐작됩니다.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모두가 마음속에 이런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 하필 거액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열쇠를 상남평야에 숨겨 개고생을 시킬까, 이런 질문 말이죠. 여러분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 위해 지옥문 앞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아하하하하.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법률 대리인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이 늙은이는 기후 변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실 관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구 재단’을 설립해 지구 온난화를 늦추고 탄소 중립을 실현할 수 있는 연구에 평생 모은 재산의 절반을 기부했습니다. 부디 내 돈이 알차게 쓰여 여러분과 미래 세대가 온화한 기후에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에서 사라진 10년 동안 저는 많은 분야의 전문가들과 만났습니다. 기후학자, 생태학자, 뇌과학자, 지구공학자, 원자력 전문가, 재생에너지 전문가 등 수많은 지적인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무척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새로운 지구 재단을 만들 용기를 냈습니다. 새로운 지구 재단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들은 제법 진전을 이루었으며 여러분에게도 언젠가 좋은 소식을 전해주리라 믿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연구자 한 분이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무척 당차고 당돌한 여성이었습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합니다. 울창한 숲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처럼 국토 면적이 좁은 나라는 숲을 마냥 늘릴 수만은 없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 친구가 덜컥 해결책을 들고 왔습니다. 식량을 재배하는 경작지에서 탄소 흡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는 해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녀가 제시한 방법은 너무 간단해 거짓말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실험을 통해 그녀가 옳았다는 걸 증명해 냈습니다. 핵심은 바로 질 좋은 비료였습니다. 우리는 이 비료를 슈퍼 비료라고 불렀습니다. 슈퍼 비료는 기존에 문제가 되었던 이산화탄소보다 수십 배 해로운 메탄을 생성하지 않으면서도 작물은 잘 자라게 하고 땅속의 탄소 저장량도 수백 배 증가시켜 주었습니다. 그녀가 발견한 특별한 미생물이 모든 걸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요. 슈퍼 비료를 뿌려준 후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흙을 자주 갈아엎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망망대해를 나침반 하나 없이 항해하던 배가 등대를 만난 것처럼 흥분되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그맘때쯤 늙은이의 몸에 몹쓸 병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심통이 났습니다. 단지 몇몇 사람만이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해 고군분투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마 깨달았을 겁니다. 지상 최대의 쇼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여러분이 찾아 헤맨 건 괴짜 늙은이의 재산을 상속받기 위한 열쇠가 아니라 지구가 더 뜨거워지는 걸 막기 위한 열쇠였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으로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가 땅속에 저장됐는지 알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약소하게나마 소정의 보상이 뒤따를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과 지구를 구했습니다. 물론 한 번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저는 멈추었지만, 여러분은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건투를 빕니다. 그럼 이번에는 진짜 물러갑니다. 안녕히!”
온 세상이 마치 리모컨의 ‘조용히’ 버튼을 누른 것처럼 고요했다. 비행기 소리도, 자동차 경적도, 아이 울음소리도, 술 취한 취객의 고함도 들리지 않았다. 괴팍한 억만장자에게 놀아난 사람들은 분노했고 함께 땀 흘린 사람들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되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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