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픽스업 소설 <뜨거운 지구 연대기> 2026년 4월
두 번째 보는 풍경이지만 여전히 승원은 숲 속에 콕 틀여 박힌 직육면체 건물에 마음이 가지 않았다. 사람이 거주하는 본래 기능보다 요새에 더 가깝다는 첫인상만 더욱 확고해졌다. 완연한 가을인데도 지난번과 똑같은 남색 슈트를 차려입은 운전사가 메르세데스 벤츠 EQS를 현관 앞에 부드럽게 세웠다. 이번에는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승원이 먼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러다 낡은 로퍼가 붉은 송이에 미끄러져 큰 키가 휘청거렸다. 그를 기다리던 서현주가 깜짝 놀라며 얼른 팔을 낚아챘다.
“조심하세요. 오 변호사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요. 감사해요, 서 비서님, 아니 서 이사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오 변호사님 덕분에요. 큰 탈 없이 유언장 집행 마무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말도 마세요. 천 건이 넘는 소송 해결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살이 쪽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회장님의 기행에 담긴 속내를 공감하고 웃어넘겼지만, 매사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더라고요. 땡볕에서 호미질하느라 날려버린 기회비용과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고 얼마나 득달같이 달려들던지요.”
승원이 이제 괜찮다는 신호로 반대편 손을 가볍게 흔들자 당황한 서현주가 그의 팔을 움켜쥔 두 손을 내던지듯 놓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어정쩡하자 급하게 두 걸음 물러서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천만 명 넘는 참가자에 비하면 몇 분 안 되는 거죠.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시민들이 기후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으니 그거면 충분합니다. 지역 사회를 중심으로 탄소 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각종 모임이 생겨났으니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게다가 정부와 기업들도 바짝 정신 차린 듯하고요. 회장님께서도 이런 반응까지는 예상하시지 못했을 겁니다. 모두 오 변호사님 덕분입니다.”
“제가 한 게 뭘 있나요. 회장님이 짜 놓은 시나리오대로 연기했을 뿐인걸요. 그나저나 기후 변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지속될까요?”
승원의 질문에 적당한 답을 찾으려는 듯 초저녁 별처럼 빛나는 그녀의 두 눈이 허공을 응시했다. 빛의 파장을 따라 대기를 자유롭게 헤엄치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했다.
“회장님 유언은 계기를 만들어 줄 뿐입니다. 좀 유별난 방법이었지만요. 공은 이제 남겨진 이들 편에 넘어갔습니다.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죠. 참, 참가하신 분들께 상남평야에서 수확한 햅쌀은 보내셨나요?”
“네, 어제 막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로 또 저를 찾으셨는지요? 설마 안에서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어머, 오 변호사님 눈치가 제법이네요.”
당장 유령이 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승원의 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저음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나 올라갔다.
“네? 저, 정말요?”
“호호호. 농담입니다. 놀라는 모습이 너무 귀여우시네요. 회장님은 정말 떠나셨습니다.”
승원은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의 소매를 걷어 올려 서현주 얼굴에 들이밀었다.
“여기 보세요. 얼마나 놀랐는지. 닭살 보이죠? 송 회장님을 가까이서 모시더니 서 이사장님도 괴짜 병에 걸리셨나 봅니다. 절 놀리셨으니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너무 궁금해서요.”
“네, 제가 답해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유언장 내용 중에 가로 15센티미터, 세로 7센티미터, 높이 5센티미터 목재 함에 특별한 열쇠를 만들어 묻어두었다는 문구가 있잖아요. 있지도 않은 열쇠함 크기까지 유언장에 기록한 이유가 뭔가요?”
이번에는 서현주의 커다란 눈이 더 동그래졌다.
“누가 열쇠함이 없다고 그랬나요? 제가 회장님을 모시고 상남평야까지 가서 직접 묻었는걸요.”
“네? 그럼 진짜 열쇠가 있었다고요? 그랬다가 정말 누가 발견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었겠죠. 회장님은 그것까지 염두에 두셨으니까요. 후후후.”
“와, 정말 두 분 대단하시네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은 가슴이 졸려서 상상도 못 하겠네요.”
어느새 두 사람이 현관 앞에 나란히 섰다. 지난번에는 보이지 않던 방주원(方舟原)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진 나무 현판이 눈에 띄었다.
“회장님께서 직접 붙이신 이름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걸었습니다. 함께 방주원을 좀 걸을까요? 여기 단풍이 정말 아름답거든요.”
두 사람은 울긋불긋한 단풍나무로 뒤덮인 숲길을 나란히 걸었다. 천장이 있다는 사실만 잊으면 천연림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숲이었다.
“오 변호사님은 여전히 방주원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죠?”
“자연은 자연 상태로 둘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제가 좀 고지식하잖아요.”
“저도 변호사님 생각에 동의합니다. 지구가 너무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말이죠. 회장님은 새로운 지구 재단을 설립해 기후 변화를 늦추려고 노력하셨지만, 동시에 만약의 상황에도 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9개의 지구 위험 한계선 중에서 벌써 5개 영역에 빨간불이 들어왔으니까요. 내일 당장 지구가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새로운 지구 재단과 방주원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회장님은 언제나 플랜 B를 준비하셨죠. 지구가 더 뜨거워지면 많은 종(種)이 멸종하게 됩니다. 방주원은 최대한 많은 동, 식물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요새인 셈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오 변호사님께서 이곳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걸음을 멈춘 서현주가 승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실내 공기 때문인지 진작에 트렌치코트를 벗어 팔에 건 승원이 급하게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 서 이사장님이 더 잘하실 것 같은데요?”
“전 재단 일만으로도 벅찹니다. 제 연구도 다시 시작해야 하고요. 방주원 일은 환경운동가로서 그동안 해온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 변호사님이 가장 잘하는 일이죠. 그리고 오 변호사님께 방주원을 맡기신 건 바로 회장님입니다.”
서현주의 커다랗고 맑은 눈망울은 무표정할 때 왠지 더 친근해 보였다. 그녀가 미처 깨닫지 못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어려운 부탁을 할 때 그런 눈빛은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정말 궁금한데, 회장님은 저 같은 인간을 뭘 믿고 이렇게 엄청난 일들을 맡기시는 건가요?”
“기분 나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사실 유언장 집행은 오 변호사님께 방주원을 맡겨도 좋은지 확인해 보기 위한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구 역사상 가장 심각했던 세 번째 대멸종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리라는 게 전문가들 견해입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오 변호사님도 잘 아시죠?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의 95퍼센트가 사라졌습니다. 그런 불행이 우리 인간 때문에 반복돼서는 안 됩니다. 부탁드립니다, 오 변호사님.”
별안간 서현주가 승원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돌발 행동에 그렇지 않아도 비 오듯 흐르는 땀이 폭포수로 변했다. 축축한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훔치던 승원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서 이사장님. 이번 일은 정말 자신 없습니다. 훌륭한 적임자를 찾으세요.”
“오 변호사님이 적임자이십니다. 회장님은 무척 신중한 분이랍니다. 마지막 순간에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꼭 오 변호사님께서 이 일을 맡으시도록 설득해 달라고요.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티핑 포인트에 도달할지 모릅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오 변호사님."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오 변호사님은 회장님과 묘하게 닮은 데가 있으니까요."
“농담하지 마세요. 전 그렇게 괴짜가 아니에요. 좋아요, 방주원을 맡겠습니다. 이제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그래도 두 분이 얼마나 닮았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정말 부자지간 같다니까요. 후후후. 오 변호사님께서 일할 공간을 새로 꾸몄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당장 보호가 시급한 멸종 위기종 목록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이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자라는 구간에서 멈춰 섰다. 오리나무 위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인 커다란 눈망울의 회색 하늘다람쥐 한 쌍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 볼이 풍선처럼 빵빵한대도 쉬지 않고 꽃줄기를 작은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승원은 처음 보는 하늘다람쥐가 신기한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서현주는 그런 승원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완벽하게 평범한 가을 오후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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