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남로, 그다음은?
2003년 9월, 괌 북서쪽 약 400km 부근 해상(북위 16도)에서 발행한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 중일 때 부산으로 출장을 갔었다. 아직 한반도는 직접적인 세력권에 들지 않았지만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바람 끝이 수학선생님 회초리처럼 매서웠다. 업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오는데 하필이면 항공편을 이용했다. 일생일대 실수였다. 항공기 흔들림(일명 터뷸런스)이 상상을 초월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놀이공원의 '바이킹'처럼 순간적으로 항공기가 요동쳤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데, 이·착륙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30여분을 극심한 공포에 떨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종류의 두려움과 불안감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사방에서 어린아이들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무사히 착륙하기만을 바랐다. 마침내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자 승객 모두 손뼉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함께 역경을 통과한 사람들은 하나가 되었다. 사상자 130명, 재산 피해액만 약 4조에 달하고, 9천 채의 가옥, 873개의 도로와 30개의 다리를 파괴한 엄청난 위력의 태풍 매미는 내게 그렇게 각인되었다. 이전까지 기상 기록을 모두 갈아치운 다소 귀여운 이름의 태풍에 한반도, 특히 제주와 부산&경남 지역은 쑥대밭으로 변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인간은 참으로 무기력했다.
태풍 매미가 이렇게 엄청난 위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가을 태풍'이었기 때문이다. 사상 최악의 태풍이었던 '사라'도 1959년 9월에 발생했다(태풍 루사는 8월 말이었다). 이는 북태평양 해수온도가 이즈음 가장 높기 때문이다. 해수온도가 높을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공급받기에 태풍이 강하게 발달하게 된다. 게다가 9월이 되면 한반도 북쪽에 위치한 북태평양 고기압이 수축해 태풍이 한반도로 북상하는 경로를 틔워주는 셈이 된다. 강하고 빠른 태풍이 제약 없이 한반도를 강타하게 되는 것이다. 태풍 매미 당시 기상청은 "우리나라 관측 이래 최대 순간풍속 극값을 경신한 주된 원인은 우리나라를 통과한 태풍 중 중심기압이 가장 낮았으며(뜨거운 해수온도 영향),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찬 성질을 가진 대륙 고기압이 위치하고 남쪽에는 발달한 열대 저기압인 태풍이 위치하여 고기압과 태풍 간의 대기 압력 공간 격차에 의하여 나타나는 힘인 기압경도력이 강했기 때문이다."라고 발표했다. 가을은 태풍이 제 위력을 곱절로 발휘하기에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에.
초대형 태풍이라던 태풍 힌남로가 다행히 중형 규모로 줄어들어 한반도를 통과했다. '엄청난 슈퍼 태풍이라더니 뭐 이래?'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제주를 포함한 남부 지방의 피해는 결코 적지 않다. 인명 피해도 발생했다. 지난번 중부지방을 강타해 인명을 앗아간 국지성 폭우처럼 어쩌면 살릴 수 있는 생명일지도 몰랐다.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니 않았으니 '휴, 다행이네!' 안도할지도 모르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만은 않다. 왜냐하면 힌남노가 기후관측 사상 처음으로 북위 25도선 북쪽 바다에서 발생한 첫 번째 슈퍼 태풍이기 때문이다. 태풍은 북태평양 서부에서 발생하는 열대 저기압 중에서 중심 부근의 최대 풍속이 17m/s 이상으로 강한 폭풍우를 동반하는 자연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열대 저기압이란 열대지역인 북위 5도와 20도 사이 해양 위에서 발생하는 저기압을 말한다. 적도 부근은 태양 에너지를 많이 받으므로 해수면이 항상 뜨겁다. 이렇게 뜨거워진 바닷물은 대기 중으로 상승하는데 이런 대기 중의 상태를 저기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힌남노가 처음으로 북위 25도, 즉 열대 지방을 벗어난 지역의 바다가 뜨거워져서 발생한 것이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이를 지구 온난화에 따른 기후 변화 때문으로 파악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힌남노는 많은 수증기와 동중국해의 뜨거운 해수면 온도를 흡수하면서 초강력 태풍으로 발달했고, 이동 경로도 이전 태풍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기후 변화가 지구의 기상 시스템을 예측 불가능하고, 불규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기상학자들의 예측을 그대로 닮았다. 태풍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 현상이다. 태풍 덕분에 적도에 집중되는 태양 에너지가 지구 전체에 분산되는 효과가 있다. 인간은 자연이 스스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상당 부분 예측 가능했고 대응 가능했다. 하지만 힌남노 이후 또 어떤 강력한 태풍이 한반도를 위협할지 모른다. 아니 분명히 위협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지가 줄어들고 있다. 이번에는 세력이 예상보다 약했지만, 다음에도 또 이러리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고 손 놓고 될 대로 돼라 하고만 있어야 할까? 물론 그랬다가는 20년 후에 어쩌면 "겨울 태풍이 가을 태풍보다 무섭다"라는 헤드라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불행하게도 지구는 우리가 걱정하는 대로 변하고 있다. 이럴 때마다 "인식이 곧 현실이다."라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아이러니하다.
<이미지 출처 : 뉴스 1, 미국 항공우주국 지구관측소가 4일 우주에서 찍은 태풍 힌남노, Pix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