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기가 고장 났다. 그러나…

빨래 공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by 조이홍

아내와 나는 취향이 매우 비슷하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살다 보니 서로, 서로를 닮아 갔다. 아내는 질색하지만 언제부턴가 외모까지 비슷해졌다. 퍽(뒤통수 얻어맞는 소리 아닙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영화 장르 정도만 비슷했는데, 이제는 정치 성향(다소 진보적인)이나 예능 프로그램(웃음 포인트), 짜장면보다는 짬뽕, 산보다는 바다를 좋아하는 취향에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감수성까지 비슷해졌다. 두 아이를 상대할 때는 완벽한 2 vs. 2가 될 정도로 둘의 합은 환상적이다. 한창 '기후 변화'와 관련된 책을 읽을 때 아내에게도 몇 권 추천했는데, 마침 당시는 아내도 열정적으로 독서 모임에 참여할 때라 <착한 소비는 없다>나 <지구를 위한 변론> 등을 함께 읽었다. 아내는 워낙 '바른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후부터는 쓰레기를 줄이고, 플라스틱 배출을 최소화하며, 분리배출을 더욱 꼼꼼히 하고 불필요한 소비는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구를 걱정하는 아내도 포기하지 못한 게 있으니 바로 '건조기'였다. <착한 소비는 없다>에서 환경을 위해 당장 사용하지 말아야 할 가전제품으로 꼽은 게 건조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끔 농담 삼아 우리 집을 '빨래 공장', 아내를 '빨래 공장 공장장님'이라고 불렀다. 자유분방한 식습관 때문에 밥 먹은 티를 역력히 드러내는 사내아이 둘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아내의 '한 깔끔'하는 성격 탓에 겨울에도 같은 옷을 이틀 이상 입지 못하게 해 빨랫감은 언제나 차고 넘쳤다. 하지만 그 많은 빨래는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처럼 다음 날이면 각각의 자리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게 쉼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 공(功)이었으니 빨래 공장이라는 이명이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아이들을 재우고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 개키며 VOD로 무한도전을 보는 것이 육아 전쟁에 지친 아내의 유일한 행복이었을까. 그토록 많은 빨래를 매일매일 처리할 수 었었던 건 사실 세탁기보다는 건조기의 힘 덕분이었다. 건조기는 빨래를 빨리 마르게 한다는 이점이 있지만,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건조기를 통해 말린 옷들은 뽀송뽀송하고 보드랍고 좋은 향이 난다는 점이었다. 새 옷에서도 느낄 수 없는 감각들이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아내는 다른 것들을 더 줄이더라도 건조기만큼은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고, 평화주의자인 나로서도 항변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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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주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건조기가 고장 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아내는 두 손을 덜덜 떨며 서비스 센터에 SOS를 요청했고, 운이 좋게도 기사님과 일정이 맞아 예상보다 빨리 방문 일정이 잡혔다. 행운은 딱 거기까지였다. 건조기를 분해해 상태를 본 기사님의 설명은 사방에 흐트러진 건조기 부품처럼 아내를 멘붕에 빠뜨렸다. 건조기 상태가 공장으로 보내 수리해야 할 만큼 좋지 않았다. 게다가 최소 4주 이상 걸리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아내의 눈빛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아내는 집안 깊숙이 보관해 두었던 '건조대'부터 꺼냈다. 워낙 크고 무거워 둘이 함께 꺼냈는데 그만 그 과정에서 설상가상으로 아내가 건조대 다리에 눈 주위를 부딪혀 살짝 멍드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스테인리스 건조대는 위풍당당하게 거실 창문 앞 볕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건조기가 없으니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장 건조기에서 말린 수건에 익숙한 아이들이 건조대에서 말린 수건을 쓰고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까슬까슬하다나 뭐라나. 뭐 사실 그렇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엄살을 부렸다. 흐린 날씨와 선선한 기온 탓에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 게 진짜 문제였다. 빨랫감은 줄지 않는데 널어놓은 빨래는 마르지 않으니 명절 연휴 고속도로처럼 정체가 심각했다. 사태를 파악한 공장장님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외출복을 제외한 집에서 입는 옷들은 이틀 이상 입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신혼 초, 잘 때 입는 옷이나 집에서 입는 옷은 며칠 입어도 괜찮으니 벗어둔 옷 좀 제발 내버려 두라고 아내와 뜨거운 설전을 벌였더랬다. 논리보다 감성, 말보다 근육이 앞선 아내는 논리 정연한 주장에 단호하게 "니가 빨래하냐?" 하며 우리 집에서 누가 진짜 '절대 권력자'인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 아내에게 이번 조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 내 말이 맞지? 잠옷은 이틀 입어도 괜찮아."라고 했더니 "단, 아빠는 예외야. 아저씨 냄새가 너무 나서."라고 받아쳤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저 호연지기를 보라! 아내는 강한 사람이었다.


결국 아내는 건조대 양옆으로 선풍기와 제습기를 가동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나. 건조기가 없어도 빨래 공장은 멈출 수 없단다. 아내의 임기응변에 박수를 보낸다. 이쯤 되면 공장장님을 사장님으로 승진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혼자 엉뚱한 상상을 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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