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체육인, 남편은 몽상가
'슈퍼발차기'라는 작가명으로 아마추어 미술 씬에서 암암리에 활동(?) 중인 아내가 얼마 전 새 작품을 완성했다. 정물이나 풍경처럼 주로 정적인 작품을 그려왔던 아내가 웬일로 인물이 부각된 동적인 그림을 그렸다. 게다가 작품 속 주인공은 여백미가 철철 넘치는 파격적인 수영복 차림의 아내 자신이다.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강남 오토바이 그녀'보다 3개월 먼저 작업을 시작했는데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계속 손대다 보니 8월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냈다. 아내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강남역을 질주하는 대신, '잠재된 욕망과 용기'를 화폭에 담아 예술로 승화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태어날 때부터 한 번도 예쁘지 않았던 적이 없던 아내는 수영과 달리기, 요가와 축구로 단련한 건강미를 뽐내기 위해 바닷가에서는 항상 비키니를 애용했지만, 이토록 과감하게 작품으로 표현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20년을 함께 산 아내를 아직도 잘 모르나 보다.
사실 아내에게 수영복은 평상복이나 다름없다. 물론 일상에서 수영복을 입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눈치 빠른 이들이라면 벌써 알아차렸겠지만, 슈퍼발차기라는 별명은 수영이 일상인 아내의 파워풀한 발차기에서 비롯되었다. 갑작스레 살이 쪄 어쩔 수 없을 때만 수영복을 교체하는 나(지난 10년 동안 세 번쯤 바꿨다)로서는 엄청난 운동량과 물과의 마찰력에 의해 수영복이 닳고 닳아서 1년에 몇 차례나 새 수영복을 장만하는 아내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동이 트기도 전에 가장 먼저 일어나 30분을 깨워도 좀처럼 일어날 의지가 없는 사내 녀석 둘을 어르고 달래 아내는 매일 수영장으로 향한다. 주말이면 근처 공원에서 5km씩 달리고 수영장에 간다. 이 정도면 하루키스럽다고 할만하다. 지난 주말에는 지역 수영대회에 출전해 금메달 2개, 은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1개씩 목에 걸었다. 메달 무게 때문에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겠다고 어찌나 너스레를 떨던지. 지역 탁구대회 16강에서 탈락하는 남편보다 확실히 아내는 더 수영에, 운동에 진심이다. 우승 기념 저녁 식사자리에서는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동료가 촬영해 준 시합 영상을 보고 또 본다. 출발 신호와 함께 마치 한 마리 돌고래처럼 가장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옆 레인에 출전한 선수는 20대고, 또 다른 레인에서 수영하던 선수는 도민체육대회 출전 경력이 있는 베테랑이라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자신의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며 기뻐했다. "수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야!"라는 제법 근사한 말도 툭 내던지며. 처음 출전하는 대회도 아닌데 간밤에 잠을 설쳤다더니 결국 아내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천정을 뚫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뎠다. 이렇게 아내가 운동에 재능이 있는 줄 알았다면 20년 전 플로리스트의 길 말고, 체육인의 길을 걸었다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금융회사에 다니던 아내는 플로리스트와 필라테스 강사를 두고 고민했고, 남편의 설득으로 전자를 택했다. 아무튼, 돌고 돌아 지금의 아내는 여리여리한 꽃을 다듬는 잔근육이 멋진 체육인이 되었다.
다음 달 아내는 마라톤대회와 아쿠아슬론 대회, 그리고 장거리 수영대회에 출전한다. 100m만 뛰어도, 50m만 헤엄쳐도 힘들어 헥헥거리는 나로서는 10km 마라톤 코스와 3.8km 물길이 거대한 벽처럼 느껴진다. 가끔 아내는 글 쓰는 내가 부럽다고 하지만, 나는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은 더 잘하는 아내가 훨씬 부럽다. 게다가 평생을 예쁘게 살지 않았던가! 수상스키나 서핑을 해도 아내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배운다. 강사들의 "운동선수하셨죠?"라는 질문이 귀에 박힐 지경이다. 가끔 아내에게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농담처럼 묻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내는 정색하고 대답한다. "이건 자기 수양을 위한 거야. 누구한테 보여줄 게 못 돼."라고. 그럼 이내 고개를 끄덕이지만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토바이를 타고 푸른 초원을 질주하는 아내 그림에는 끝없이 이어진 길이 가운데 나 있다. 이쯤 되면 궁금하다. 과연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말이다. 어쩌면 아내는 망백(望百)의 나이가 되면 인어(人魚)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여기에 기막힌 반전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아내는 인어공주였고, 바닷가에 놀러 온 한 미소년에게 반해 인간의 삶을 택했다. 그래서 아들 둘을 낳고, 어느 날 황금 비늘이 덮인 수영복을 입고 다시 바닷속 왕국으로 돌아가려는 지도…. 그러므로 저 길 끝에는 분명히 바다가 있을 터였다. 이제 오토바이를 탄 아내가 수영복을 입은 이유가 설명된다. 오늘 밤, 아내의 비키니 수영복을 숨겨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