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첫 번째 한일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맞붙은 한국과 일본

by 조이홍

1954년 3월 7일 오후 2시, 한일전이 치러질 '메이지 스타디엄'에는 FIFA기(旗)를 중앙에 두고 왼편에는 대한민국 국기가, 오른편에는 일본 국기가 강한 동남풍에 경쟁하듯 펄럭거렸다. 아침부터 내린 눈비로 진흙탕이 된 운동장은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은 그 어느 때보다 투지로 가득했다.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한·일 축구전은 스포츠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36년간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받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새삼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었다. 해방 후에도 제대로 된 사과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양국 간 첨예한 정치적 대립 상황하에서 삼천만 동포와 대표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오로지 승리하는 것뿐.


객관적인 전력은 대한민국이 다소 열세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라 다양한 국가들과 평가전을 갖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숙적 일본과는 14년 만에 치르는 경기라 전력 분석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은 서독을 비롯한 유럽 강팀들과 평가전을 치르며 자국 축구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일본 언론들은 6대 4로 자국 승리를 예상했고 홈경기 이점도 무시하지 못할 터였다. 킥오프 전까지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일본 관중들은 자국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막 전쟁을 끝낸 끼니조차 거르는 나라에게 패할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축구는 객관적인 전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체력 위에 기술, 기술 위에 열정으로 완성되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거기에 더해 '간절함'이라는 비밀 병기까지 가슴에 품었으니 투지가 넘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 '투지'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일본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여비가 없어 십시일반으로 겨우 일본에 도착했다. 경기가 벌어질 메이지 스타디엄에서 현지 적응 훈련은 꿈도 꾸지 못했다. 요즘 같으면 초등학교 대항전도 이렇게 치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축구공은 어디로 튈지 몰랐다. 전반전 휘슬이 울리고 시작부터 우리 대표팀은 상대 골문을 수차례 위협했다. 아쉽게도 골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진흙투성이 운동장은 두 팀에 모두 악재로 작용했을 테지만, 낯선 경기장과 어웨이 경기라는 악조건이 발목을 잡았다. 오히려 전반 16분, 우리 수비수의 백패스를 낚아챈 일본 선수에게 허무하게 선취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1점에 무너질 우리 대표팀이 아니었다. 전반 22분, 박일갑 - 정남식 선수로 이어지는 환상적인 패스를 이어받은 정군강 선수의 그림 같은 슛으로 동점골을 기록했다. 좋은 흐름은 계속돼 전반 34분, 민병대 선수의 롱패스를 이어받은 최광석 선수가 역전골을 성공시켰다. 전반전은 2:1 리드로 기분 좋게 마무리됐다.


후반전 10분까지는 일본 공격이 활기를 찾는 듯했다. 양 팀이 엄청난 접전을 벌였다. 더 절실한 팀은 우리 대표팀이었다. 승리의 여신이 붉은 유니폼을 향해 미소 지었다. 후반 20분, 최광석 선수가 문전에 센터링한 공을 성악운 선수가 헤더 골로 연결시켰다. 스코어는 3:1. 다시 후반 37분에는 최정민 선수가 단독 찬스를 살려 멋지게 골을 성공시켰다. 스코어는 4:1. 후반 40분, 최정민 선수가 쐐기골을 넣어 스코어는 5:1. 후반 45분 페널티킥을 허용했으나 골키퍼 홍덕영 선수의 선방으로 후반전은 무실점으로 끝이 났다.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인 대한민국 대표팀의 완벽한 승리였다. 경기 후 이유형 감독은 "처음부터 승리는 자신했다. 그러나 경기장이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에 예상외의 득점을 얻은 것은 단합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고, 일본 감독은 "경기장 컨디션이 좋지 못해 패스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상외의 대패를 했다. 한국의 포드 진의 공격은 상당히 강했으며 센터포드 그리고 양 윙의 활약에는 놀랐다. 그러나 백(수비) 진은 뚫을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똑같은 상황(진흙탕 경기장)에서 우리 팀은 예상하지 못한 독점을 했고, 일본 팀은 패스가 통하지 않았다. 스페인과 평가전에서 1:2로 아깝게 패한 전적을 가진 팀이었다. 이런 상반되는 결과를 초래한 게 팀 전력은 아닐 터였다. 만약 객관적 전력만으로 승패가 결정된다면 축구가 지금처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주일 후 치러진 2차전은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전반전을 2:1 리드로 끝냈지만 결국 후반전에 동점골을 허용했다. 컨디션 난조와 팀 플레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후반전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아시아에 주어진 첫 월드컵 본선 진출 티켓은 대한민국이 손에 쥐었지만 개선할 여지가 많은 경기였다. '국제무대에서도 해볼 만하다'라는 자신감은 어쩌면 양날의 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귀국 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축구동경시합세계대회 회고와 전망'이라는 좌담회(1954년 3월 28일)에서 배종호 코치는 2차전의 부진을 "피로가 회복되지 못해 충분히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하면서 1차전이 끝나고 '인삼'을 삶아먹여 피로를 회복시켜주려고 했는데 구하지 못해 아쉬웠다는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인삼'으로 상징되는 우리 대표팀의 처우를 돌려 말한 것이 아닐까 싶다.


월드컵 본선 진출을 놓고 벌어진 첫 번째 한일전에서 대한민국이 일본을 1승 1무로 가볍게 제압했다. 전쟁 직후, 전력 열세, 열악한 경기장 상황, 그리고 심판의 편파 판정에도 불구하고 얻은 값진 결과였다. 게다가 이들은 프로 선수도 아니었다. 일본에 패하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이유형 감독의 각오가 단지 수사적 표현만은 아니었다. 당시로서는 축구를 순수한 스포츠로만 즐길 수 없었던 시대적 맥락이 존재했고, 이는 여전히 우리 DNA에 각인되어 있다. 당시 대표팀 주장을 맡았던 주영광 선수가 동아일보 좌담회에서 한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축구라는 것은 부딪치고 머리로 받고 태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하고 강한 체력을 가졌더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정신력이 좌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세기하고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대표님은 체력과 정신력, 기술과 전략까지 모두 갖춘 강팀이 되었다. 16강 진출을 두고 설왕설래할 까닭이 없다. 이제 목표는 우승 트로피가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2022년 현재 한국과 일본은 총 80회 경기를 치렀다. 우리나라가 42승, 일본이 15승을 기록 중이고, 무승부도 23회나 있다. 이제 한일전은 축구경기뿐만 아니라 모든 스포츠 경기에서 꼭 이겨야 하는 게 '국룰'이 되었다. 한 운동선수가 예능에 나와 한일전은 '피가 마른다'라고 토로하면서도 꼭 이겨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경기에 임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기면 영웅, 지면 역적이 되는 게 현실이니까. 운동 경기에서 다른 나라에 패하면 화는 나지만 '질 수도 있지'하게 되는데 아직 일본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과연 누가 '죄인'인가!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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