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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Nov 23. 2022

든든한 우리 편을 잃은 것 같은

전면 개정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대학교 때 '씨알두리'라는 근·현대사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사학과에 진학한 탓에 다양한 분야의 역사 동아리가 있었는데 처음부터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때로 운명은 아주 사소한 어긋남에서 비롯되었다. OT 때 친해진 동기가 먼저 가입했고, 첫 모임 날 딱히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다 그 친구를 따라간 것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던지 강의실에서 교수님들께 배웠던 역사보다 씨알두리에서 보고 듣고 공부한 내용이 인생에 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세상은 그전까지 내가 알던 곳과는 많이 달랐다.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았다. 꽃향기보다 악취가 진동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떻게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을까 허무하기까지 했다. 진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치 빨간 알약을 선택한 네오처럼 혼란스러웠다. 혼탁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길은 잠들지 않는, 깨어 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숱하게 많은 밤을 토론하고 논쟁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스무 살의 나는 어른이 되어갔다. 


1학년 여름방학이던가 아님 겨울방학이던가, 아무튼 합숙에서 유시민 작가님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처음 읽었다. 4박 5일 '합숙'은 한적한 시골(주로 강촌)에 들어가 선배들이 지정해 준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었다. 짬짬이 천렵 비슷한 활동도 했지만,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읽고 토론하고 읽고 토론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정말 세상이 이랬다고? 처음에는 부정했고 다음으로 분노했다가 조금씩 진실을 수용하게 되었다. 마지막 날 밤에는 졸업한 선배들도 합류해 삼겹살 파티와 함께 토론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 풋내기 사학도였던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선배들한테 대들기 일쑤였다. 혁명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졸업하면 왜 그리 순한 한 마리 양이 되는지 따져 묻는 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정말 잘 알지도 못하면서…. 


'1980년대 지식 청년의 지적 반항'이라는 평을 들었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세계를 지금 모습으로 만든 결정적인 열한 가지 사건을 다룬 보고서다. 초판 원고는 스물여덟의 청년 유시민이 최루탄 가루 날리는 거리에서 낮을 보내고 구로공단 근처 벌집 자취방에 돌아와 밤새도록 쓴 저항의 결과물이었다. 문장은 거칠고 시선은 공격적이었다. 지금 우리가 아는 온화한 유시민 작가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개정판이 나왔고 절판되었다가 2021년 말 전면 개정판이 다시 나왔다. 함께 학교 생활을 한 아내가 중학생 첫째 아이 읽으라고 사 오던 날 내가 먼저 펼쳐 읽었다. 반가웠다. 그런데 이번 개정판에는 예전 책에는 없던,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챕터가 추가되어 있었다. 


오래된 책을 다시 쓰면서 유시민 작가님은 세상과 스스로의 변화를 돌아보았단다. 그리고 그 소회를 '에필로그'에 적었다. 그 부분을 읽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 내 생각과 상당히 비슷해서 놀랐고, 따뜻한 미소를 가진 유 작가님이 역사의 발전을 예전처럼 확신하지 않는 점도 충격이었다. 가장 믿었던 든든한 우리 편을 잃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럼, 이제 인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불안한 눈동자가 허공에서 방황했다. 유 작가님이 무슨 말을 했길래….  


“100년 후를 생각해 본다. 누가 21세기 문명사를 쓸 것인가? 쓴다면 어떤 사람과 사건을 중심에 둘까? 경우의 수는 셋 정도 된다. 첫째, 핵전쟁으로 지구 생태계가 절멸해 인간이 한 명도 남지 않을 경우, 말 그대로 역사의 종말이다. 둘째, 기후위기 이론이 옳고 인류가 온난화를 막지 못해 남극과 북극 일부를 빼고는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경우, 누가 쓰건 기후위기가 파국으로 치달은 경위를 중심에 두고 역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인류가 핵과 기후위기를 포함한 절멸의 위험을 모두 극복하고 과학혁명의 혜택으로 자유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경우, 20세기와 크게 다른 유형의 인물을 중심에 두고 21세기 문명사를 정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학자, 엔지니어, 기업인을 역사의 주역으로 평가할 것이다. 나는 인류가 세 번째 길을 가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은 없다.”


북한의 잦은 도발에도 불구하고 핵전쟁 위협은 영원히 인류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핵전쟁 가능성이 심심치 않게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기억 저편에 뭍어 두었던 먼지 자욱한 공포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기후위기는 현재 진행형이고 우려하는 일들이 실제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두 가지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인류는 더 이상 호모 사피엔스가 아닐 터였다. 신인류, 어쩌면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우리가 아는, 호모 사피엔스가 주인공인 역사는 끝이 난다. 지혜로운 인간이 신이 된다고 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역시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신인류가 '힘은 세지만 책임의식은 없는 신'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없는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책임 의식이 없을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우리는 이미 수많은 역사를 통해 경험했다. 비록 인류의 역사가 끝나더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써 내려가는 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몫이다. 신인류가 책임의식을 가진 신이 되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유시민 작가님이 쏘아 올린 작은 공 하나가 나를 또다시 잠 못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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