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승을 향한 48년 간의 멈추지 않는 도전
2022 카타르 월드컵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세상이 뒤숭숭한 탓인지 월드컵 열기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누가 '지금 월드컵 경기나 보고 있을 때야?'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축구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사실 마음이 좀 그렇기는 하다. 떨어지지 말아야 할 꽃잎들이 떨어져 가슴에 돌덩어리가 들어앉은 듯 답답하고 불안한 세계정세에 하나로 힘을 합쳐도 부족한 마당에 자꾸만 나라를 둘로 나누려는 이들 때문에 없는 두통도 생길 지경이다. 열정적인 축구 마니아도 아니고 A 매치만 겨우 찾아보는 불량 축구팬이 굳이 월드컵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는 하다. 그래도 나서서 축구 이야기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는 축구는 단순한 운동 경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 하나가 펼쳐 놓은 이야기에 숱하게 많은 밤을 울고 웃었다. 솔직히 하루쯤은 축구 덕분에 기분 좋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얇은 지갑을 열어 동료들에게 기꺼이 아메리카노를 쏜 날도 있을 터였다. 그 축구 덕분에 어떤 날은 생판 모르는 남과 어깨동무하고 목이 메도록 응원도 했다. 경기 때마다 붉은 옷을 챙겨 입고 발 디딜 틈도 없는 광장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축구가 그저 상대편 골대에 골을 많이 넣는 스포츠였다면 우리가 그랬을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각본 없는 드라마에 굴곡진 현대사의 축소판이 축구다. 우리나라의 월드컵 도전기가 그렇다. 어두운 IMF의 터널을 투팍(박찬호, 박세리)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 겪는 시련들도 시원하게 터진 골들이 날려주길 바라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 글을 쓰리라 마음먹었다. 16강에 진출하면 그것대로 기쁠 테지만, 실패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지는 않다. 그 과정을 한 마음으로 즐긴다면 말이다. 2000년대 이전 월드컵 도전기는 '1승'을 향한 끝없는 도전이었다. 소위 축구 선진국들에게 '한국 같은 축구 후진국은 월드컵에 왜 나오냐'는 비아냥을 들을 때도 있었단다. 그러나 한국은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고, 또 당당히 4강에 진출했다. 그 놀라운 신화의 배경에는 눈물로 얼룩진 패배들이 있었다. 그 눈물과 한숨, 열정과 투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954년, FIFA가 처음으로 아시아에 문호를 개방해 세계축구대회(월드컵) 출전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본선 진출 티켓은 한 장, 한국과 일본이 본선 진출을 두고 아시아 지역 예선전을 치러야 했다. Home & Away 방식이지만, 국교를 맺지 않은 일본 대표팀이 한국 땅에 발을 들이게 할 수 없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경한 입장으로 두 경기 모두 도쿄에서 치러졌다. 당시 대표팀을 이끈 이유형 감독이 월드컵 출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패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고 다짐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객관적인 전력 열세와 준비 미흡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1차전은 5:1로 대승했다. 2차전은 2:2 무승부, 결국 본선 진출권은 우리나라가 차지했다. 당시 3천여 명의 재일교포와 함께 요코스카 항에 기항 중이던 우리 해군 약 이병 여명이 세일러복을 입고 도라지타령, 아리랑, 노들강변 등을 목놓아 불러 선수들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당시 우리 선수들은 붉은 유니폼, 일본 선수들은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한일전의 서막이었다.
FIFA로부터 35,000 달러를 보조받아(경향신문 1954년 5월 14일 기사) 60시간 넘는 험난한 여정 끝에 개막 당일 현지에 도착했다. 시차 적응은커녕 경기장에서 제대로 몸 풀 시간도 없었다. 1차전 상대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우승팀이자 우승 후보 헝가리. 당시 헝가리는 '마법사'라 불리며 국제경기 32전 무패를 기록한 최고의 팀이었다. 백 년 동안 진 적 없다는 축구 종주국 영국을 웸블리 구장에서 6:3, 넵 스타디움에서 7:1로 굴복시켰다. 그 최강 팀과 개막 다음날 오전 경기를 치러야 했다. 축구 전문가들이 0:20 헝가리 압승을 예상할 정도로 전력 차이가 컸고 실제 경기 결과도 0:9로 대패했다. 그나마도 골키퍼인 홍덕영 선수가 온몸에 멍이 들 정도로 유효 슈팅을 막아낸 결과였다. 우리나라 유효 슈팅은 단 2개,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했던 경기였고, 후에 한국 축구의 전술 변화를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주일 후 제네바에서 치러진 터키와의 2차전도 0:7로 대패해 서독과는 경기조차 치르지 못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대회는 서독의 우승으로 끝났지만, 조별 예선에서 서독 역시 헝가리에 8:3으로 대패했으니 헝가리가 얼마나 강한 팀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나라는 전쟁 직후에 참여한 첫 월드컵에서 '졌지만 정말 잘 싸웠다.'
전쟁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우리나라는 국제무대에서 여전히 많은 것이 서툴었다. 대한축구협회 직원의 출전 신청서 분실이라는 사상초유의 사건으로 월드컵 예선조차 출전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랑을 했다. 잘했다!" 개그 소재로 쓰인 노래처럼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끝나버렸다. 이전 대회까지 월드컵 우승국은 개최국이 속한 대륙에서 나왔지만,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함으로써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 아울러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된 한 10대 소년이 이 대회를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에드슨 아란테스도 나스시멘토'라는 긴 이름을 가졌지만 사람들은 그를 축구 천재 '펠레'라고 불렀다.
예선전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을 1승 1무로 가볍게 제압했으나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모두 패배하여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숙적 일본을 이긴 것으로 만족한 대회였다. 펠레가 조별 예선 2차전에서 부상을 당해 거의 뛰지 못했지만 작은 새 '가린차'의 활약으로 지난 대회 우승국 브라질은 트로피를 지켰다.
우리나라는 FIFA에 벌금 5,000달러를 내면서까지 대회에 불참했다. 한 장의 본선 진출권을 따내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Home & Away 방식으로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해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이 연달아 지역 예선을 보이콧했다. 일각에서는 북한과의 경쟁을 피하기 위해 불참했다는 설도 있다. 북한과 호주 두 나라만이 플레이오프 형식으로 본선 진출팀을 가렸는데, 북한이 6:1, 3:1로 연달아 승리하면서 본선 티켓을 거머쥐었다. 본선에서 북한은 축구 강국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아시아 국가 최초로 월드컵 8강에 오르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편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는 FIFA 재가입 20년 만에 월드컵을 개최해 우승컵을 차지했다. 비록 모든 경기를 홈그라운드인 웸블리 구장에서 치르고 자국에 편파판정 의혹도 있었지만 말이다.
호주에 발목을 잡혀 플레이오프 행이 좌절된 쓰라린 대회였다. 예선에서 1무 1패를 안고 2차 예선에 나선 우리나라는 일본이 호주와 1:1로 비겨 마지막 호주전을 이길 경우 재경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임국찬 선수의 페널티 킥 실축으로 1:1로 비겨, 최종 1승 2무 1패로 2승 2무의 호주에 뒤져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내주고 말았다. 이 대회에서 화려한 공격 축구를 선보인 브라질이 통상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해 줄 리메 트로피를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 지난 대회에서 거친 플레이에 시달리다 부상으로 결장한 뒤 다시는 월드컵에서 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펠레는 멕시코 월드컵에서 멋진 활약을 선보였다. 축구 천재는 여전했다.
불세출의 영웅 차범근 선수의 등장으로 공격력이 한층 배가된 우리나라는 본선 진출을 노렸으나 또다시 호주에 막혀 좌절해야만 했다. 최종 예선에서 호주와 만난 대한민국은 홍콩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0:1로 아깝게 패배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이 대회에서 브라질의 독주도 막을 내렸다. 펠레에 이어 세계 최고 선수 자리를 넘겨받은 '요한 크뤼프'가 이끄는 토털 사커 전도사 네덜란드가 강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새 우승컵을 치켜든 건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이끄는 서독이었다. 본선 무대에 첫 출전한 동독은 라이벌 서독을 꺾으며 대회 초반 파란을 일으켰으나 서독이 2라운드에서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2위를 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어쨌든, 서독은 월드컵 트로피를 가져갈 충분한 역량이 있는 강팀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은 건 중동의 숙적 이란이었다. 홍콩과 1:0, 이란과 0:0을 기록하며 1승 1무로 제법 괜찮은 출발을 보였지만, 이란에 0:1로 진 호주에 1:2로 패하면서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그 사이 이란은 6승 2무로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승점 14점을 기록하며 여유 있게 본선 진출 티켓을 따냈다. 반면 우리나라는 쿠웨이트와의 홈경기에서 1:0으로 이겼지만 호주와 0:0 무승부를 기록하고 연이어 쿠웨이트, 이란 원정 경기를 모두 2:2로 비겨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에서 고배를 마신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이 대회부터 본선 출전국이 24개국으로 늘어났다.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에 배정된 본선 티켓도 두 장으로 늘어났다. 지역 예선은 4개조 1위 팀이 최종 예선을 치러 본선에 진출할 2개국을 가려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과 함께 3조에 포함된 한국은 쿠웨이트 원정에서 0-2로 패해 최종 예선 진출에 실패했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월드컵 본선 진출의 길은 30여 년 동안 멀고도 험난했다. 축구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브라질이 12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하는 듯했으나, 우승 트로피는 브라질을 누른 이탈리아가 가져갔다. 이로써 이탈리아도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1983년 프로축구를 출범시킨 우리나라는 32년 간의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마침내 본선에 티켓을 거머쥐었다. 예선전 첫 경기인 네팔을 상대로 2:0으로 승리했으나 말레이시아에 0:1로 패해 감독 경질 사태가 벌어졌다. 문정식 감독의 빈자리를 김정남 코치가 대행해 네팔과 말레이시아를 차례로 꺾고 예선 2라운드에 올랐다. 인도네시아를 제압한 대한민국은 최종 라운드에서 일본을 이기고 이라크와 함께 본선에 진출했다. 본선 진출 24개국 중 최약체로 평가받던 우리나라는 또 한 명의 축구 천재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 1:3 패배했다. 하지만 후반 28분 박창선 선수가 터뜨린 25m 중거리 슛은 한국 축구사의 명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후 불가리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고 이탈리아전에서 2:3으로 패했다. 승리의 여신은 유독 대한민국에게만 인색했다. 콜롬비아가 재정상 이유로 개최를 포기해 멕시코가 월드컵을 두 번 개최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마라도나가 활약한 아르헨티나가 8년 만에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2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룩한 우리나라는 예선전에서 완벽한 경기력을 보였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네팔, 인도와 함께 4조에 속한 우리나라는 6전 6승으로 첫 관문을 가볍게 통과했다. 25 득점에 실점은 1점도 허용하지 않았다. 최종 라운드에서도 3승 2무에 5득점 1실점하며 1위로 본선 행 티켓을 차지했다. 이회택 감독이 이끈 우리나라는 스페인, 벨기에, 우루과이 등 축구 강국들과 E그룹에 속했다. 예선 무패라는 기록으로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넘쳤지만, 안타깝게도 본선 결과는 여전히 대한민국이 우물 안 개구리임을 실감케 했다. 3전 3패. 우승컵은 아르헨티나를 꺾은 서독이 차지했다.
김호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대표팀은 예선에서 7승 1무를 기록, 조 1위로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다. 최종 라운드에서 첫 상대 이란을 3:0으로 제압했지만, 이라크와 2:2, 사우디아라비아와 1:1로 비기고 일본에 0:1로 패해 본선 진출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경우의 수' 계산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마지막 상대인 북한을 2골 차 이상으로 무조건 이겨야 했고, 동시에 일본과 사우디아라비아 중 한 팀이 패해야 본선 진출이 가능했다. 우리나라는 북한을 3:0으로 가볍게 제압했고, 일본은 경기 종료 휘슬을 불기 직전 이라크에 결정적인 동점골을 허용하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도하의 기적'은 이렇게 탄생했다. 대한민국 3회 연속 본선 진출 확정! 본선에서 축구 강국 스페인을 상대로 2:2 무승부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찰랑찰랑 샴푸 요정 홍명보의 프리 킥과 날쌘돌이 서정원의 그림 같은 골 덕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월드컵 첫승은 우리나라 몫이 아니었다. 볼리비아와 0:0을 기록하고 전차군단 독일에 2:3으로 패해 첫승도 16강 진출도 좌절되었다. 우승컵은 전통 강호 브라질에게 돌아갔다.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우리나라 대표팀은 아시아 예선전에서 가볍게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최종 예선 B조에서 6승 1무 1패로 일찌감치 프랑스행을 굳혔다. 이른바 '도쿄대첩'이라 불리는 숙명의 한일전이 이때 치러진다. 0:1로 경기 내내 뒤지다가 후반 38분 서정원의 헤딩 골에 이어, 41분 이민성의 중거리 역전 골로 일본에 극적으로 승리했다. 본선에서 한국은 네덜란드, 멕시코, 벨기에와 함께 E조에 속했다. 만만한 팀은 하나도 없었지만 예선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이라면 해볼 만했다. 첫 상대는 강호 멕시코로 전반 28분 왼발의 달인 하석주 선수가 파울로 얻어낸 프리 킥을 골로 연결시키며 월드컵 출전 사상 첫 선취점을 기록했다. 호사다마였을까! 첫 골의 흥분이 채 가라않기도 전인 2분 후, 하석주 선수가 통한의 백 태클로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한다. 10명의 선수가 투지를 불태웠으나 결과는 1:3 역전패. 일주일 뒤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0:5로 참패하면서 감독이 현지에서 경질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김평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나선 마지막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시작 7분 만에 선제골을 내줬으나 후반 26분 유상철 선수가 결정적인 동점골을 만들어 무승부를 기록했다. 최종 성적은 1무 2패. 우승은 월드컵을 창시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프랑스 플레이메이커 '지네딘 지단'은 펠레, 마라도나와 같은 축구 천재들의 뒤를 이어 10번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수적천석(水適穿石)',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반세기 월드컵 도전기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절반은 본선에 진출조차 못했고 본선에서 첫승의 염원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로 끝나지 않았다. 가벼운 물방울이 묵묵히 떨어져 바위를 뚫듯이 우리나라는 끝없이 세계 무대라는 거대한 장벽을 향해 돌진했고 마침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반세기 동안 끝없이 흘렸던 피, 땀, 눈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2022년,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은 다시 한번 거대한 장벽과 마주했다. FC 아나콘다에게 첫승을 내준 개벤져스팀의 김민경 선수가 한 말을 되새겨 본다. "축구는 더 절실한 팀이 승리한다. 이번에는 아나콘다가 더 절실했다. 다음 경기는 우리가 더 절실할 테니 승리는 우리 것이다." 열정과 열정, 투지와 투지가 맞붙는 세계무대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더 절실한 팀이 승리할 것이고 그것이 대한민국 대표팀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