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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Dec 11. 2022

내릴 역을 놓쳤다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을 읽다…

"저, 이번 역에 내려요."

"저는 벌써 지나쳤는 걸요."


한때 우리가 열광했던 광고에서나 벌어질 일이 일어났다. 내려야 할 지하철 역을 놓쳐 그만 한 정거장 더 가고 말았다. 명세빈처럼 어여쁜 여학생이나 어린 왕자 같은 류시원은 없었다. 첫눈에 반한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었다. 책 때문이었다.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짧은 순간 책에 푹 빠졌다.  


읽고 있던 책은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된 박진호 작가님의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이었다. '퇴근 후 피렌체를 걷다'라는 소제목과 어울리게 책에는 작가님이 여행하며 직접 그린 그림과 이탈리아 도시의 다양한 풍경이 마치 어릴 적 뛰놀던 골목길을 오랜만에 걸으며 그 시절을 회상하듯 아스라이 담겨 있었다. 눈 깜빡하기도 아까운 일촉즉발의 사건도, 낯선 여행지에서 꿈꾸는 로맨틱한 일탈도 없지만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을 가졌다. 결국 그 매력 덕분에 내릴 역도 놓쳐버렸지만, 한 정거장쯤이야 '허허' 웃어넘길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번은 버스에서 책을 잃다가 집 근처에서 잠들어버려 30분이나 더 간 적도 있었다. 야심한 밤 허허벌판에 내려 얼마나 무서웠던지. 

사실 작가님 친필 사인과 함께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렇다고 부채 의식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면지에 자필로 적어 주신 문구에 자꾸 눈이 갔다. "책을 읽는 이유... 멈춤을 배우기 위해서래요. (중략) 제 책에도 그런 부분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죠." 이 짧은 문구 때문인지 작가님 책은 단숨에 읽을 수 없었다. 보통은 책을 손에 잡으면 다 읽을 때까지 다른 책을 시작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다른 책을 읽다가 생각에 휴식이 필요할 때 주로 펼쳤다. 이탈리아의 낯선 골목 풍경이 왠지 우리 동네 인양 정겨웠다. 작가님의 화풍 탓인지, 브런치 작가라는 동료(연대) 의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기에 깃들어진 글들 역시 화려하거나 요란하진 않아도 담백한 맛이 일품인 알리오 올리오를 닮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연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제 1/3 정도 남았는데 헤어지기 아쉬워 일부러 천천히 읽고 있다.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스페인, 체코, 쿠바 세 나라만이 버킷 리스트에 남았더랬다.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을 읽으며 문득 이탈리아에 가보고 싶어졌다. 아마 이 책이 이탈리아를 관광지 위주로 소개했다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을 터였다. 작가님이 좋아하는 예쁘고 소박한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들이 궁금했다. 맛집 정보도 거의 없어 어쩌다 로컬 식당이라도 소개되면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작가님이 아기자기하게 그린 City Map을 따라 무작정 걸어보고 싶었다. 단조로운 일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고 싶어 시작했다는 작가님의 그림은 책이 되어 누군가에게 꿈나무 한 그루를 심어 주었다. 어쩌면 이것이 작가님이 바라던 '멈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면 어쩌지…).


이 책은 '2022 우수출판콘텐츠'에 선정되어 출판되었다.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출품했다가 쓴맛을 보았다. 박진호 작가님의 정성이 담뿍 담긴 책을 읽어보니 "떨어질만했네" 싶다. 와신상담까지는 아니더라도 내년에는 꼭 선정도록 정신 차려야겠구나 단단히 마음먹었더랬다. 희망도서로 신청한 <이탈리아 골목길 드로잉 산책>이 동네 도서관에 들어왔다는 문자를 받았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책이 나오면 꾸준히 희망도서를 신청한다.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이렇게 '품앗이'라도 하여 동료 작가님들의 책이 잘 팔리면, 많은 사람에게 읽히면 좋겠다. 모든 책이 좋은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책들은 모두 좋았다. 좋은 걸 나누고 싶은 선한 마음은 인간의 DNA에 심어져 있다. 내 말이 아니다. <휴먼카인드> 저자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그랬다. 이러한 본성이 우리를 마지막 빙하기에서 살려주었다. 독서의 빙하 시대에 작가들이 생존할 방법은 서로를 얼싸안는 것밖에 없다. 아직 '호모 리딩북러스(독서하는 인간)'에게 안녕을 고할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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