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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03. 2023

아이에게 그림책 4,500권
읽어주면 어떤 일이 생길까

그림책의 나비 효과

 "우리 동네에 마을 도서관이 생긴 지 4년 5개월쯤 되었다. 둘째 아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3개월 동안 660권의 책을 빌렸다. 가끔 아내와 내 책도 몇 권 끼여 있었지만 주로 아이들 그림책을 빌렸다. 마을 도서관이 생기기 전에는 이웃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 이웃 도서관은 2014년에 개관했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84개월 동안 1,634권을 대여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 그림책이 대부분이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최근 4년간 한 달에 30권 정도 그림책(청소년 소설 포함)을 빌렸다. 집에도 아이들 그림책이 좀 많은 편이다. 대략 2천 권가량 있었는데 오래되어 더는 읽을 수 없어 버린 책들과 조카들에게 물려준 유아용 그림책을 제외하면 1천5백 권가량 남아 있다.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과 소장한 책을 합치면 4천 권을 훌쩍 넘겼다."  


 위와 같은 글을 쓴 지도 벌써 1년 하고 4개월이 지났다. 연말에 문득 궁금해 동네 도서관과 이웃 도서관의 '도서대여현황'을 검색해 보니 각각 810권과 1742권으로 늘어나 있었다. 대여 도서가 16개월 전보다 258권 늘었다. 예전처럼 아이들이 그림책을 즐겨 읽지 않으니 증가세가 주춤했다. 여기에 매월 좋아하는 작가의 그림책이 나오면 서너 권은 구입했으니 집에 소장하고 있는 그림책도 소폭 증가했을 터였다. 종합해 보면 지금까지 아이들에게 읽어주거나 아이들이 스스로 읽은 그림책이 대략 4천5백 권 정도 되었다. 중학교 3학년 첫째 아이는 그림책보다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주로 읽지만, 둘째 아이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예전에 즐겨 읽던 그림책들을 꺼내 읽곤 한다. 4천5백여 권의 그림책을 읽은 아이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전 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자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저 깊은 곳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찻잔 속 미세한 잔물결로 그칠지, 아니면 세상을 휩쓸 만큼 거대한 태풍으로 거듭날지 지금은 알 수 없다."라고 썼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현상에 관한 원인을 그림책을 읽은 덕분아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오늘의 '나'는 지난 시간 무수히 행했던 '선택의 총합'이듯이, 오늘의 '아이들' 역시 과거에 우리 부부가 혹은 아이들 스스로 선택했던 결과의 총합일 터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억측이 다소 포함되어 있을 테지만, 잠정적인 결과를 정리해 볼까 한다. 4천5백여 권의 그림책을 읽은 아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집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1. 심심치 않게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꿈동이'라는 독서·논술 워크북을 작성했다. 학년이 끝날 때마다 시상했는데 아이들은 6년 내내 금상(최고상)을 받았다. 책을 읽고 뒷 이야기를 상상하거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거나 독서 퀴즈를 내는 등 간단한 독후 활동이었다. 매일 적게는 대여섯 권, 많게는 스무 권씩 그림책을 읽을 때이니 이 정도 독후 활동은 땅 짚고 헤엄치기만큼 쉬웠을 터였다. 매일매일 해야 하는 숙제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은 일기를 쓰는 대신 일주일에 다섯 번 꿈동이를 썼다. 아이들보다 많이 쓴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림책 읽기와 꿈동이 독후 활동 덕분에 아이들은 교내, 교외 글쓰기 대회에서 심심치 않게 상을 받았다. 출판사에서 진행하는 그림책 쓰기(전반부는 작가, 후반부는 참가자가 상상하기)에서 수상해 수십만 원어치 그림책을 선물로 받는가 하면, 안중근 의사 추모 전국 글짓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아 상금을 타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전국 단위 백일장에서도 종종 상을 받았다. 아빠가 전수한 글짓기 비법의 영향도 일부 있을 테지만, 읽고 쓰기를 반복한 결과임이 분명했다. 


2. 청소년 소설이나 공부법, 관심분야에 관한 책으로 독서가 이어진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절반은 1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 사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하다. 영상 콘텐츠의 시대이니 말이다. 책을 꼭 읽어야 하는지 질문하면 속 시원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근거는 없지만, 인류 문명의 지혜와 지식이 담긴 책에서 삶의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우리 부부에게 책은 아직 읽어야 할 무엇이었다. 아이들이 늘 책과 함께 하기를 바라지만, 말을 물가에 데려가도 정작 물은 먹일 수 없는 것처럼 아이들 독서도 부모 마음 같지는 않았다. 비록 우리 성에 차지는 않을지언정 아이들은 지금도 책을 읽는다. 첫째 아이는 과학 분야나 공부법에 관한 책을, 둘째 아이는 비록 팔 할이 만화책이지만 그림책이나 드물게 청소년 소설을 읽는다. 방학 때마다 아빠가 추천해 주는 도서들도 한몫했다. 첫째 아이는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둘째 아이는 게임할 시간이 부족해 책과 조금씩 멀어지지만, 최소한의 독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스스로 계획표를 작성한다. 지식 습득과 지혜의 축적뿐만 아니라 '시간 관리 능력' 역시 시작은 그림책에서 비롯되었다


3. 가족 독서 모임으로 사춘기와 갱년기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사춘기 아이와 갱년기 부모 사이에는 언제나 전운이 감돈다. 대화는 사라지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깨톡이 대신한다. 우리 집도 예외일 수 없으나 유전적인 영향(아무래도 내 쪽)인지 수다스러운 아이들 덕분에 묵언 수행하는 절처럼 고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록페스티벌에 참가한 연인들처럼 한껏 목소리를 키워 이야기한다. 평소 대화도 꼭 싸우는 것처럼 날이 서있다. 그럴 때면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책(예를 들어 가족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는 루리 작가의 긴긴밤)으로 가족 독서 모임을 진행한다. 아이들은 귀찮게 '뭘 이런 걸' 하면서도 쉽게 속내를 드러낸다. 아내도 나도 마찬가지다. 같은 지붕 아래 살지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하고 가족 독서 모임은 서로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가 된다. 자주 하지는 못해도 속 깊은 대화가 필요할 때 이만한 게 없다. 그림책으로 아이들에게 독서 습관을 길러주지 않았다면, 어느 날 갑자기 "가족 독서 모임 하자!" 한다고 아이들이 "네!" 할까?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이야 말로 차곡차곡 빌드-업이 필요한 법이다. 게다가 같은 책을 읽으면 공통 관심사가 생겨 서먹서먹한 순간에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이는 둘째 아이가 잘 써먹는 스킬인데, 분위기가 싸할 때(혼날 일을 했을 때)마다 예전에 아내가 읽어준 그림책 이야기를 덜컥 꺼내곤 한다. 위기 탈출에도 그림책은 단단히 한몫한다.  


4. 어휘력/문해력이 발달한다 

 둘째 아이 담임 선생님과 전화 상담할 기회가 있었다. 이례적(?)으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은 둘째 아이가 국어 시간을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배경 지식도 풍부하고 어휘력도 뛰어나다고 담임 선생님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셨다. 오죽하면 "우리 OO 이야기하시는 거 맞죠?"라고 되물었을까.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나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어른스러운 말을 종종 구사해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런 고급 단어를 어디서 배웠는지 물어보면 "지난번에 읽어 준 그림책에 나왔잖아."하고 시크하게 대답했다. 어른들은 줄거리로 그림책을 기억했지만, 아이들은 문장으로 기억했다. 아직 한글도 깨치지 못한 첫째 아이가 좋아하는 그림책을 동생에게 술술 읽어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림책 문장을 통째로 암기한 것이다. '이거, 우리 아이 천재 아니야!' 잠시 환상을 품기도 했지만, 이는 고맘때 아이들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4세 전후의 아이들은 뇌가 빅뱅처럼 폭발했으니 그 정도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일 터였다. 아무튼, 꾸준히 그림책을 읽어준 덕분에 아이들의 어휘력과 문해력은 평균을 훨씬 웃돈다(이는 다수의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는 것과도 관계있다). 국어 성적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2020년 EBS <당신의 문해력> 제작팀이 전국 중학교 3학년 2,4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문해력 진단평가'에서 나온 충격적인 결과에, 30%는 평균 미달이고 10%는 초등학생 수준, 비하면 만족할만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독서에 능숙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글의 이해도가 훨씬 높으니, 전전두엽의 활성화 덕분에, 독서는 공부머리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많이 읽어주었더니 긍정적인 효과가 이렇게나 많다. 이것 이외에도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좋은 점들도 있다. 아이들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정말로 그림책을 좋아하게 된 아내는 '그램책 큐레이터' 자격증을 땄다. 아이들에게 좋은 그림책을 골라주던 혜안으로 지난해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그림책 큐레이션 봉사도 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책을 출간하리라는 소망도 키워나가고 있다. 손재주가 많은 아내가 분명히 멋진 그림책을 출간하리라 믿는다. 사실 나는 그림책 읽어달라는 아이들에게 "아빠 오늘은 너무 피곤한데 좋아하는 그림책 한 권씩만 읽을까?" 하며 게으름 피우는 불량 아빠였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열 권이면 열 권, 스무 권이면 스무 권, 언제나 아이들이 원하는 만큼 읽어주었다. 그런 아내가 대단하다고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15년 동안 아이들에게 그림책 4천5백여 권을 읽어주어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면 그 공은 모두 아내에게 돌아가야 한다. 오늘도 "무자식이 상팔자야!" 외치는 아내는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읽을 책을 한 보따리 빌려 왔다. 그림책이 넘치는 집, 즐거운 우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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