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열혈팬의 커피잡설
안타까워서 그렇습니다.
강남역 사거리에 사무실이 있을 때 건물 1층에 '커피빈'이 있었다.
경기도에서 강남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새벽부터 서두르다 보니 거의 모든 날을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생활습관이 되었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는지 달리는 버스에서 책을 읽으려는 노력은 수능을 한 달여 앞둔 수험생처럼 번번이 애처로웠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같은 페이지만 수십, 수백 번을 서성거렸다. 버스에서 내려도 잠은 미처 달아나지 못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한 잔의 진한 커피였다. 회사가 입주한 건물 1층에 커피빈 매장이 있었지만 발걸음은 늘 회사 맞은편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절세미녀 천관이 운영하는 술집에 매일밤 드나들던 김유신처럼 한 차례 예외도 허용치 않았다. 발길을 꺾으려 김유신은 애마의 목이라도 베었지만, 몸뚱이가 전 재산인 서러운 직장인이 애꿎은 다리를 자를 수는 없으니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이 자연스레 루틴이 되었다.
솔직히 스타벅스 커피가 환상적일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쓰고 텁텁했다. 그 정도 품질이 다른 프랜차이즈 매장보다 훨씬 좋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커피 맛을 제대로 몰랐서 그랬을 수 있지만, 그래도 스타벅스의 익숙함이 편안했다. 게다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르는 덕분인지 매장 직원이 '매일 드시던 거죠?" 하며 알아서 주문해 줄 때는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가기까지 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손님을 만날 텐데 어떻게 얼굴과 취향을 일일이 기억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능평리 장동건'이라는 다소 독특한 닉네임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런 별종이 나만은 아니었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다 보면 희한한 닉네임이 정말 많았다. 정마담, 불광동 휘발유 같은 별명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마포 갈매기, 부산 갈매기 등등 갈매기는 왜 그렇게 좋아들 하는지. 뭐니 뭐니 해도 최고는 '커피빈 좋아'였다. 스타벅스 직원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커피빈 좋아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고 외치는 상황이 참 얄궂다 싶었다. 아무튼, 그 매장만의 운영 방침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타벅스 직원은 나뿐만 아니라 자주 오는 손님의 커피 취향을 기억해 주문할 때 친근하게 대화를 풀어나갔다. 심지어 다른 매장으로 전근가게 되었다면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장사 잘 되는 매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었다. 나에게 스타벅스는 베프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나면 기분 좋은 친구가 되어 주었다. 한 건물에 커피빈이 있어도, 바로 옆에 엔제리너스가 있어도, 몇 걸음 더 가면 아이스크림이 끝내주는 폴 바셋이 있어도 매일 아침 스타벅스로 발걸음이 향했던 이유였다.
얼마 전 우연히 2021년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의 매출 성적표를 보았다.
(2022년 결과는 대략 3~4월경 발표한단다)
기사를 읽는 순간 '억'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국내 Top 10 커피 프랜차이즈의 매출액을 살펴보니 역시 스타벅스가 스타벅스했다. 매출액이 무려 2조 3,856억 원으로 나머지 9개 커피 업체(투썸, 이디야, 빽다방, 메가 커피, 커피빈, 할리스, 컴포즈, 폴바셋, 탐앤탐스)를 합친 1조 3,698억 원보다 1조 원이 더 많았다. 매장수를 따지면 이디야가 훨씬 더 많았고, 축구 스타 손흥민을 앞세워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며 낮은(합리적인) 가격과 대용량이라는 무기로 커피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메가 커피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는 넘사벽 그 자체였다. 매출액으로만 따져 우리나라 인구를 100명이라고 가정했을 때, 64명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신다. 11명은 투썸 플레이스에 가고, 대략 5명 내외는 메가 커피, 컴포즈 커피, 그리고 빽다방의 비교적 저렴한 커피를 선호한다. 나머지 20명은 이디야, 할리스, 커피빈, 폴바셋, 엔제리너스, 그리고 탐앤탐스에 간다. 이디야를 제외하면 이곳 매장들은 스타벅스와 가격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싸기까지 했다. 이들은 과연 각각의 매장에서 어떤 장점을 발견했을까? 스타벅스 열혈 팬으로 궁금했다.
2021년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으로 거듭났다.
바로 그해 커피를 판매하는 매장수가 치킨집을 넘어섰다. 게다가 한국 농수산식품유통공사는 지난해 커피와 음료점업 점포 수가 9만 9천 개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18년 5만 개에서 4년 만에 거의 두 배가 된 셈이다. 팬데믹이 장기화되면서 커피 매장들이 제대로 영업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2022년 생두와 원두를 합한 커피 수입액은 13억 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전년 대비 42%나 증가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에 따른 소비 회복과 팬데믹 기간에도 테이크아웃·배달·홈카페 바람이 불어 커피 수요가 꾸준히 증가한 덕분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한국갤럽의 2021년 조사에 따르면 가정 내 커피 머신 보유율이 2020년 35%에서 2021년 3월 기준 45%까지 상승했다. 악랄한 바이러스도 우리 국민의 커피 사랑은 꺾지 못했다. 사람들이 SNS에 남긴 흔적을 모아 빅데이터로 분석하는 송길영 바이브 컴퍼니 부사장이 쓴 <그냥 하지 말라>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구절이 나온다.
“아침 9시의 커피는 잠을 깨우는 각성의 커피, 오후 1시의 커피는 사회 일원으로 잘 버티고 있음을 확인하는 위안의 커피, 오후 4시의 커피는 회사생활의 고단함을 달래는 해우소의 커피였습니다. 이런 맥락이라면 맛이나 퀄리티가 절대적인 선택 기준이 아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산미를 섬세하게 따져서 마시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커피 한 잔에서도 자신의 삶을 더 잘 챙기고 싶은 욕구가 읽힙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커피 사랑은 식지 않았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층 세련되지고 다양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번 고급스러워진 입맛은 웬만해서 다시 내려가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넥스트 레벨의 커피, 한 잔의 훌륭한 커피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위기는 곧 기회니 말이다. 지금 커피 업계는 서드 웨이브 중이다. 퍼스트 웨이브는 인스턴트커피로 대표되는 커피의 상업화, 세컨드 웨이브는 스타벅스 같은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가 이끄는 커피문화라면 서드 웨이브는 한층 고급화, 미식화된 커피문화를 말한다. 위에 이야기했던 '20명이 방문하는 커피 매장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역시 서드 웨이브에 있지 않나 싶다. 얼마 전 이들 커피 매장 중에 두 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두 곳 모두 주문받는 직원 없이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았다. 편리하긴 했지만, 왠지 그 매장에 다시 가지 않을 것 같았다. 키오스크는 섬세해진 소비자의 입맛과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에 너무 차가웠다. 비용 절감이나 경영 합리화라는 이유일 테지만, 그 매장들이 놓치는 게 있었다. 커피는 기계로 찍어 내는 공산품이 아니다. 커피 한 잔을 내리기까지 인간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고, 그 노력은 주문 받는 순간부터다. 스타벅스를 따라잡으려면 스타벅스처럼 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블루 보틀, 테라로사, 퍼센트 아라비카가 하듯이 해야 하지 않을까. 스타벅스 열혈팬이지만 절대강자도 라이벌이 있어야 더욱 강해질 수 있는 법, 다른 커피 매장들의 선전이 아쉽다. 어디를 가든 완벽한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커피 애호가로서 그보다 행복할 일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