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보다 아내를 더 사랑한다고 느낄 때
유별난 사랑꾼에 아내바라기라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나의 우주 한가운데에 두 아이가 자리를 잡았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듯 우리 일상도 아이들을 중심으로 바삐 움직였다. 비즈니스 목적으로라도 직장인은 골프를 꼭 배워야 한다는 주위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5년여를 차곡차곡 모은 비상금으로 골프 세트를 사는 대신 캠핑 용품을 장만했다. 나이 들어 온 가족이 할 수 있는 운동은 골프밖에 없다고 했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될 터였다. 당장 골프(연습)장에 아이들을 데려갈 수는 없었다. 한창 캠핑 붐이 일기도 했지만, 몇 해 전 아내와 단 둘이 미국을 여행하면서 여러 세대가 함께 캠핑을 즐기는 그들의 문화가 부러웠다. 언젠가 그런 가족이 되리라 마음먹었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둘째 아이 첫돌을 지낸 후부터 주말이면 부지런히 캠핑장을 찾아다녔더랬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이불 삼아, 적막뿐인 산중에 울려 퍼지는 벌레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을 추억으로 봉인했다. 캠핑 갈 여건이 되지 않으면 놀이 공원, 도서관, 박물관, 전시회 등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장소들을 골라 두루 유람했다. 때때로 몸은 고되었지만, 더 많은 날들 동안 마음은 온기를 가득 품은 봄날의 오후 햇살 같았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지만 그렇게 아버지가 되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만년설처럼 단단하리라 여겼던 부정(父情)도 지구온난화로 녹아내리는 영구 동토층처럼 자꾸만 녹아내렸다.
요즘 들어 부쩍 아이들보다 아내를 더 사랑하는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나이 들어 아내가 끓여 놓는 '곰국'이 무서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마치 평생을 바다에서 지내다 마지막 순간을 위해 어린 시절 헤엄쳤던 하천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다. 선천적으로 비위가 약했다. 어릴 적에는 생선 냄새(비린내)만 맡아도 헛구역질할 정도였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멀미도 심했다. 시외버스만 타면 검은 비닐봉지를 한 손에 꼭 움켜쥐어야 했다. 그런 나라서, 아이들이 먹다 남은 음식에 입을 대지 못했다. 아이들이 워낙 깨끗하게(?) 먹는 편이기도 했지만,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음식이 아까워도 어쩔 수 없었다. 정결하기로는 대한민국 일등인 아내조차 아이들이 남긴 음식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자연스레 먹었다. 모정(母情)이 깊이와 넓이를 짐작할 수 없는 바다라면 아비의 사랑이란 고작 실개천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입 짧고 비위 약한 내가 아내가 남긴 음식은 군말 않고 척척 잘도 먹었다. 못 먹을 게 뭐람, 없어서 못 먹지 하고는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해치웠다. 아이들이 먹던 아이스크림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아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딱 붙어서 '한입만'을 외쳤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살짝 기괴해도 이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아내가 아이들보다 남편인 나를 더 사랑하는구나 싶은 때도 있다. 청춘을 나라에 받친 대가로 왼쪽 발에 평생 완치되지 않는 불치병을 얻었다. 나는 계절성 피부염이라 부르고, 아내는 무좀이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내 왼발이 닿기만 해도 아내는 몹쓸 병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처럼 질색했다. 잠 잘 때면 옆에서 싸움이 나도 모르는 사람이 내 왼발이 닿는 건 귀신 같이 알아서 '살고 싶으면 발 치워라!' 잠꼬대했다. 그런 아내가, 무좀이 세상에서 가장 고약한 질병이라고 믿는 아내가 요즘 들어 남편 발톱을 잘도 깎아준다. 그저 깎아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저런 도구를 동원해 깔끔하게 손질까지 해준다. 수술용 장갑이나 일회용 비닐장갑도 끼지 않고 허연 맨손으로 말이다. 발톱을 너무 짧게 깎아 며칠간은 걸을 때마다 아파서 고생하지만, 아내가 정성스레 발톱을 정리해 주는 걸 보고 있으면 사랑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나라도 만지고 싶지 않은 발을 이토록 애지중지해 주다니…. 국경도 언어도 초월하는 게 사랑이라더니 몹쓸 병까지 가뿐하게 초월했다. 그게 나라서 눈물 나게 행복했다.
누군가에게는 기괴하게 들릴 테지만, 이만하면 천생연분이다 싶다. 다른 건 다 해도 음식물 쓰레기만큼은 절대 못 버리겠다던 내가 요즘에는 설거지라도 하면 개수대에 음식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 손으로 하나하나 모아 버린다. 가스비 폭등으로 난방비라도 조금 아끼려 실내 온도를 낮추면 아내는 여지없이 핫팩 두 개를 주문한다. 집에 핫팩이 네 개뿐이라 아내가 두 개, 아이들이 하나씩 사용하면 내 몫은 없다. 그래도 잠든 아내 품에 말없이 핫팩 두 개를 안긴다. 아내가 이불을 걷어차면 감기라도 걸릴까 몇 번이고 이불을 덮어 준다. 때로 사랑이란 녀석은 참 고약하지만, 그래도 사랑 덕분에, 사랑 때문에 삶은 살아갈만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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