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와 음악
글을 쓸 때면 유튜브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주로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들이다. 가요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번번이 노래를 따라 불러 글 쓰는데 방해가 된다. 지독한 K-POP 팬의 부작용일 터였다. 이에 반해 클래식은 귀에 익은 멜로디가 수묵화의 풍경처럼 저만치 멀리서 여백의 미를 드러내기만 할 뿐, 나그네의 바쁜 걸음을 방해하지는 않으니 글 쓰기에 더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좋은 글이 나오냐면, 뭐 그건 또 별개 문제다. 가장 많이 듣는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다. 감미로운 첼로 선율을 듣노라면 왠지 '일필휘지'로 글이 써 내려가지는 기분이다. '와, 나 작가 같다' 싶다. 다음으로 비발디의 '사계'도 많이 듣는다. 귀에 익숙한 봄 1악장을 듣는가 싶으면 어느새 겨울 마지막 악장까지 끝나버리는, 글 쓰는데 집중력을 발휘하기에 이보다 좋은 곡은 없다 싶을 정도다. 한때는 슈만의 '사육제'를 지겹도록 듣기도 했다. 좋아하는 하루키 작가가 <일인칭 단수>에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로 듣는 사육제를 최고로 꼽았기 때문이다. 혹시 루빈스타인의 연주로 듣는 사육제를 글 쓰는 내내 틀어 놓으면 0.01퍼센트라도 그의 글 솜씨를 따라가지 않을까 헛된 희망에 부풀기도 했다. 물론 돌아오는 건 쓴 좌절뿐. 유튜브 알고리즘이 선물한 '자클린의 눈물'이나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곡도 가끔 듣는다. 클래식을 자주 듣긴 해도 배경 음악에 지나지 않으니 클래식 듣는 귀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할 터였다. 그래도 왜 조성진이 천재 피아니스트인지는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아무튼, 글쓰기 할 때 음악을 틀어놓지 않는 건 물고기가 물 없이 헤엄치는 것과 같았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필 2월 하순부터 일본 애니 OST에 꽂혔다. 양궁 금메달 리스트의 화살이 담담하게 과녁으로 날아가 작고 노란 원 안에 꽂히 듯 그렇게 내 가슴에 박혔다. 신카이 마코토의 <스즈메의 문단속>이란 작품이 개봉된다는 소식을 접한 후부터였다. <너의 이름은>, <날씨 아이>, <초속 5cm>, <언어의 정원>, 그리고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비록 일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 감성이 내 가슴에서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헤어진 첫사랑과 해후한 기분이랄까. 3.1절 하루를 제외하면 글 쓰는 내내 이 곡들만 들었다(지금 이 순간에는 바흐의 편안한 첼로곡들이 흘러나오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일본 맥주를 끊고, 합리적 가격에 품질 좋은 유O클O도 몇 년째 사지 않았다. 이들 기업이 과거를 반성하기는커녕 현재의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침략의 역사에 대해 사과한 하루키는 끊지 않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과감하게 손절했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잘못을 되풀이했다. 일본 애니 OST 좀 듣는 게 어때서 싶다가도 아내의 할아버지를,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이건 아니지 싶다. 줄여야지, 열 번 들을 거 다섯 번만 듣고, 다섯 번 들을 거 세 번만 들어야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내 양심이 시키는 최소한의 정의였다.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정의란 고작 이 정도뿐이지만,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는 이 정도에 그치면 안 되지 않을까. 권력은 화무십일홍이요 역사는 영원하다. 이 평범한 진리 앞에서 왜 사람들은 두 눈을 질끈 감을까.
<이미지 출처 : 초속 5cm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