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순댓국 한 그릇 되는 것
'오늘 점심은 뭘로 하지?' 12시가 다가오면 딱히 즐겁지 않은 고민이 시작된다. 바로 직장인의 점심 메뉴 선택 순간. 늘 가는 식당에 뻔한 메뉴들뿐이지만 그래도 한두 가지 마음 가는 음식은 있기 마련. 내 경우는 순댓국밥이 그랬다. 나를 포함해 우리 팀 모두가 순댓국에 진심이라 월요일을 '순댓국밥의 날'로 정해 별다른 일정이 없으면 으레 순댓국집을 찾았다. 몇 년 동안 어긴 적이 없을 정도였다. '순댓국'이라 통칭해도 순댓국밥은 결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순대만 또는 고기만(각종 내장류)에 얼큰이, 들깨 빼기에 부추 추가까지 MCU 못지않은 멀티버스를 구축했다. 네 명이 그냥 "순댓국 넷이오" 하는 법이 없었다. 4인 4색, 원하는 국밥 스타일은 각자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했다. 입 짧은 나는 주로 '순대만'을 주문했다. 머리 고기나 내장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순댓국은 역시 순대를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순대를 공깃밥 뚜껑에 잠시 덜어 두고 가슴까지 뜨거워지는 국물에 먼저 밥을 말아먹는다. 뜨끈한 국물과 고슬고슬한 밥알이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가는 장면이 마치 눈앞에 펼쳐진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진다. '순대만'을 주문하면 머리 고기나 내장이 없는 대신 순대가 푸짐하게 나오기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할 때도 많다. 국밥을 절반쯤 비우면 자연스레 눈은 순대로 향한다. 먹기 좋게 식은 순대를 새우젓이나 양념 소금에 살짝 찍어 먹는 순간, 순댓국집은 미슐랭 가이드 별 세 개 식당보다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변한다. 직장인의 영원한 숙적 '월요병'을 견딜 수 있었던 건 8할이 순댓국 덕분이었다. 바닥을 훤히 드러낸 뚝배기를 바라보며 만 원짜리 한 장으로 간사한 입을 달래고 덤으로 허기진 속까지 든든히 채울 수 있으니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싶었다.
얼마 전 일이었다. 청담동에 미팅이 있어 갔다가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시간이 붕 떠 간단하게 저녁을 먹기로 했다. 주차하기 힘든 동네라 차 댈 곳을 찾다가 마침 작은 주차장이 딸린 순댓국집이 눈에 들어왔다. 청담동과 순댓국이라 뭔가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오묘한 조화에 이끌려 어느새 곁에 딸린 작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나를 발견했다.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가게 안은 벌써 북적거렸다. 맛집인가? '예약석'이라는 푯말이 빈자리도 그냥 노는 자리는 아니라고 눈치를 줬다. 주인 입장에서 한창 바쁜 시간대에 달랑 순댓국 한 그릇 팔아주는 손님이 반가울 리 없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다닥 먹어 치우고 서둘러 자리를 비워주리라 마음먹었다. 아차, '순대만'이 아닌 그냥 순댓국을 주문했다. 아, 이 지독한 자기 검열. 직원들이 어찌나 기민하게 움직이는지 기본 반찬을 내오는가 싶더니 브런치 동료 작가님 글 한 편 다 읽을 틈도 없이 순댓국이 나왔다. 그랬다, 잘 되는 식당의 생명은 속도였다.
늘 하던 대로 공깃밥 뚜껑에 뜨거운 순대를 식히려는데 숟가락이 자꾸 허탕만 쳤다. 몇 번 더 휘휘 졌다가 뭔가 잘못되었다 싶어 주인아저씨를 부르려던 찰나 순대 끄트머리가 반쯤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연거푸 두 녀석이 더 등장했는데 모두 '순대'라고 부르기에 민망했다. 누군가 반쯤 베어문 듯한 순대 세 알을 뚜껑에 올려놓고 '주인 나오라 그래!'를 시전 하려다 멈칫했다. 염치없는 불청객도 기꺼이 들인 주인아저씨의 마음씨를 배신할 수 없었다. 한 숟가락 맛본 얼큰한 국물도 '형이 참아요. 내가 있잖아요." 속삭였다. 머리 고기와 내장류도 잡내 하나 없었다. 진짜 맛집이었다. 애초에 다짐대로 묵묵히 국물에 공깃밥을 말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웠다. 사실 그다지 배가 고프지는 않았는데 숟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깍두기는 왜 또 그리 맛있는지. 청담동에서 순댓국집으로 살아남는 일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국밥값 만 원이 하나도, 정말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환했던 바깥이 그새 어둑어둑해졌다. 길게 늘어선 자동차 후방등이 마치 무당벌레 날개처럼 보였다. 다들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참 부지런히 산다 싶었다. 문득 생뚱맞게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이 떠올랐다. 부슬부슬 빗방울이 나렸다. 나는 언제 누군가의 빈 속을 순댓국처럼 따뜻하게 채워준 적이 있었던가.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아니 기꺼이 뭉근한 순댓국 한 그릇이 되는 것이면 좋겠다 물색없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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