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섬 (2)

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by 조이홍

위미항을 나서는 쾌속 고속정 옐로우서브마린 호가 햇빛을 머금은 서귀포 앞바다를 미끄러지듯 헤엄쳐 나갔다. 낚싯배가 지나간 수면 위로 하얀 물보라가 긴꼬리를 드리웠다. 한여름의 열기를 품은 바람이 쉴 새 없이 얼굴을 핥았다. 에어컨 냉기처럼 시원하지는 않아도 숨이 턱턱 막힐 듯한 더위는 식혀주었다. 온몸의 수분을 증발시킬 듯한 더위가 한풀 꺾이자 고슴도치 가시처럼 뾰족한 마음이 조금은 뭉뚝해졌다. 낚싯배에 몸을 실어 바다 한가운데까지 나온 마당에 입만 삐죽 내밀고 있을 수는 없었다. 물고기 만지는 건 소름 끼치도록 싫었지만, 일단 잡기만 하면 선장님이나 아빠가 도와줄 터였다. 잘난 척하는 동생이 나보다 물고기를 많이 잡아 거드름 피우는 꼴은 죽어도 보고 싶지 않았다. 기왕 할 바에야 녀석에게 질 수 없었다. 게다가 이번 여행에서 엄마한테 잘 보여 점수를 따면 예상보다 빨리 애플 워치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친구 중에 아직도 깡통 워치를 차고 다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밉상 녀석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내 쪽에서 먼저 시비 거는 일은 없다. 엄마 말대로 수학 문제나 SNS보다 재미있는 제주에서 모험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삐죽삐죽 삐져나온 생각들이 정리되자 왠지 뱃속이 몽글몽글해졌다. 그제야 배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30분 전에 만난 사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이들끼리는 금방 친해졌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하는 건 역시 동생이었다. 중학생이 된 지 벌써 6개월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초등학생과 어울리는 꼴이라니. 역시 수준이 비슷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녀석이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좋아했다. 자기도 바다낚시는 처음이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자리돔이니 옥돔을 들먹이면서 제주 근해에 서식하는 물고기에 관해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얼마 전부터 노랑촉수나 청줄돔 같은 아열대 어종들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는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제주 근해 어종에 관한 콘텐츠라도 본 모양이었다. 얼핏 들으면 그 많은 물고기를 다 잡아 본 줄 착각할 정도였다. 가짜 모험담에 홀린 아이들 표정이 너무 진지해 그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영어 단어 하나 외우는 건 쩔쩔매는 녀석이 쓸데도 없는 곤충이나 물고기에 관해서라면 달달 외우고 다니니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아이들 뒤로 바다낚시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젊은 아줌마 세 명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하는지 얼굴에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유행도 돌고 돈다고 엄마 어렸을 때 제주 한달살이가 한창 인기라더니 최근 들어 다시 전국의 아이들이 제주도로 모여들었다. 연애 시절 뱃멀미에 호되게 당했다는 엄마와 아빠는 언제 불쑥 불청객이 들이닥칠까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만 연신 지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지만, 입방정 떨었다가 괜스레 미운털 박히고 싶지 않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선체에 큼지막하게 옐로우서브마린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쾌속 고속정의 선장님은 아담한 키에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해진 피부가 눈에 띄는 뱃사람이었다. 반소매 셔츠 밖으로 나온 근육과 꽉 다문 입술은 강한 인상을 풍겼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깊은 눈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이 담겨있었다. 오랜 세월 묵묵히 바다를 지켜온 뱃사람 특유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불볕더위에 한 시간 가까이 벌세웠지만, 이 순간만큼은 잭 스패로우 선장보다 멋져 보였다. 푸른 바다를 가르는 옐로우서브마린 호 옆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상쾌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을 처음 걷는 듯한 묘한 쾌감이 일었다. 그렇게 10여 분을 질주하던 낚싯배가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한 손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확성기를 든 선장님이 몇 가지 주의사항을 전달하겠다며 집중을 외쳤다. 유튜브에서나 보던 골동품처럼 생겼는데 성능이 제법 뛰어났다. 바다낚시가 처음인 승객들이 알아두어야 할 낚시 요령과 배 안에서 지켜야 할 안전 수칙이 귓속에 쏙쏙 박혔다. 낚싯배에 탑재된 최신식 장비에 관해 설명할 때 선장님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최신 알파 레이더, GPS, SSB 위성안테나, 정밀 어군탐지기 등을 소개하는 표정이 마치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다. 한 차례 설명을 마친 선장님은 마지막으로 세 가지 사항만은 꼭 지켜달라고 당부했다. 자신이 선창할 테니 큰 소리로 따라 하라고 했다. 배에서 절대로 뛰지 말 것(배에서 절대로 뛰지 말 것), 어떤 일이 있어도 구명조끼를 벗지 말 것(구명조끼를 벗지 말 것), 어린아이는 절대 혼자 두지 말 것(어린아이는 절대 혼자 두지 말 것).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잠자는 서귀포 앞바다를 흔들어 깨웠다. 아빠와 엄마, 바다낚시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차림의 젊은 엄마들도 처음 등교한 초등학생처럼 선장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설명이 끝나자 저마다 걸치고 있는 구명조끼 버클을 단단히 조였다. 단 한 사람만 예외였다. 선장님이 앞에서 뭐라고 말하든 뭐가 그리 바쁜지 구명조끼 버클을 풀어 헤친 채 딴청만 부렸다. 엄마도 선장님 이야기를 듣느라 동생 구명조끼 확인을 깜빡했다. 점수 딸 기회다 싶어 재빨리 녀석의 구명조끼를 꽉 조여 주었다. 덥고 답답해서 싫다면서도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모처럼 감동적인 모습에 눈의 여왕도 만족스러운지 입꼬리가 한껏 올라갔다. 그때 아빠가 기자회견장에 나온 베테랑 기자처럼 선장님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태풍 개나리가 한반도 남부와 제주도를 향해 북상한다는데 바다는 괜찮을까요? 앙증맞은 이름과 달리 세력이 무척 강한 태풍이라는데요.”

“네,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출항이 좀 늦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바다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해경 상황실과 기상청에 재차 확인했는데 오후 날씨는 가끔 마파람만 살랑거릴 뿐 어느 때보다 맑을 거라고 합니다. 더욱이 서귀포 앞바다는 배불리 먹고 잠든 아기처럼 온순할 거랍니다. 다만 기상관측 이래 가장 무더운 날이라 낚시하는 틈틈이 수분 섭취만 신경 써주시면 됩니다. 태풍 개나리의 영향권에 드는 자정을 기해 선박 운항이 전면 중단되니까 이 배에 탄 여러분은 억세게 운이 좋은 겁니다. 내일부터 꼬박 이틀은 낚싯배가 뜨지 못할 테니까요. 아무튼 바다가 잠잠하면 입질도 잦아지니 짜릿한 손맛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제주에 도착한 지 이틀째, 경로를 예측할 수 없다던 초대형 태풍 개나리가 우리나라를 향해 빠르게 이동한다는 뉴스가 속보로 떴다. 일본 서쪽 먼바다에서 세력을 키운 슈퍼 태풍이라고 했다. 한 기상 전문가는 최근 살인적인 더위가 바로 태풍 개나리의 영향 탓이라고 했다. 뜨겁게 달궈진 북태평양 바닷물에서 흡수한 열기를 태풍 개나리가 고스란히 품고 있기 때문이라나. 또한 갈수록 태풍 경로 예측이 어려워지리라 경고도 했다. 마찬가지로 지구가 뜨거워진 탓이었다. 몇 해 전 지구가 더 뜨거워지는 걸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몇몇 청소년들이 엄청나게 비싼 명화에 토마토케첩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사회 수행평가 주제여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 기후변화에 흥미가 생겼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여행이 끝나면 제대로 공부해 볼 참이다. 태풍 전 고요인지 제주 바다가 유난히 잔잔했다. 짜릿한 손맛을 기대할 만하다는 말에 아이들이 먼저 부산스러웠다. 느긋한 척했지만 내 심장도 쿵쾅거렸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바다낚시에서 반드시 동생보다 큰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세 살이나 어린데도 무식하게 힘만 센 녀석은 언제나 형을 함부로 대했다. 물고기 못 만진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다 함께 낚시하자고 제안하는 걸 보면 싸가지는 개에게나 줘버렸다고 보는 게 현명하다. 그렇다고 녀석 뜻대로 되도록 얌전히 있을 내가 아니다. 이번만큼은 재수 없는 녀석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참이니 말이다. 나도 모르게 낚싯대 손잡이를 불끈 움켜쥐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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