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섬 (4)

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by 조이홍

악몽을 꾸었다. 시커먼 혀를 날름거리는 난폭한 바다에 휩쓸려 어디론가 끝없이 떠밀려 갔다. 지독한 적막 속에서 파도가 내 몸을 삼켰다 뱉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꿈이라고 생각하니 두렵지는 않았다. 대신 몸서리치게 쓸쓸했다. 지금까지 알던 세계와는 다른 세상에 나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듯한 고독함에 모든 걸 내려놓으려는 순간 낯익은 얼굴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 얼굴은 분명 동생 호민이었다. 손을 뻗어 동생을 잡으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아주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는 끝없이 세상의 저편으로 밀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꿈속에 있는데 어떻게 또 잠들 수 있을까. 샘솟는 호기심도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했다. 이대로 잠들면 더는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까무룩 잠들려던 찰나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음이 들려왔다. 작지만 또렷하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였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이번에도 내 몸은 내 편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흐느끼는 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덜컥 겁이 났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형체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동생 얼굴이 반가운 건 아마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호, 호민아, 왜 울어? 여기 어디야?”

“나도 몰라. 형아 깨어나지 않을까 봐 엄청 무서웠어.”

“엄마랑 아빠는?”

“몰라. 여기엔 우리 둘밖에 없어.”

“어? 뭐라고?”

“여기에는 형아랑 나밖에 없다고, 그리고 저 쓰레기들이랑.”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 처진 몸을 추슬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 모래사장 너머로 무지갯빛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바다가 무지개색이었다. 그렇다고 피터팬에 나오는 네버랜드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수면 위에 가득 찬 플라스틱 쓰레기 때문에 바다가 일곱 빛깔 무지개로 보였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지켜보았다. 허튼 웃음이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자꾸만 새어 나왔다.

“야, 정호민! 제법 괜찮은 연기였다. 하지만 언제나 2% 부족하다니까. 내가 속을 줄 알아? 이거 깜짝 카메라지? 눈치챘으니까 엄마, 아빠 빨리 나오시라고 해. 어디 숨어 계셔?”

“형아 미쳤어? 무섭게 왜 그래! 정신 나간 소리 그만해! 나도 깜짝 카메라면 좋겠다. 어마어마한 파도가 낚싯배 덮친 거 기억 안 나?”

동생이 구명조끼를 눈앞에 들이밀고 흔들어댔다.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이 맞춰지자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제럴드 포드급 항공모함도 통째로 삼켜버릴 만한 파도가 장난감만 한 낚싯배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왔다. 다급한 순간에도 4D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더랬다. 바보였다. 눈앞에 닥친 게 진짜 현실이었는데 말이다. 온 가족이 손을 맞잡은 순간 시커먼 파도가 배를 삼켰다. 첨벙거리는 아이 장난에 뒤집히는 노란 종이배처럼 공중으로 솟구친 낚싯배가 수직으로 수면에 처박혔다. 수영이라면 언제나 자신 있었지만, 미쳐 날뛰는 바다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낚싯바늘에 달린 새우처럼 구명조끼에 매달린 몸이 자꾸만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진작에 깜짝 카메라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지만, 터무니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지 않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재수 없는 놈. 싫다는 사람 억지로 끌어들이더니. 너 때문이야, 언제나 너 때문이라고! 너 때문에 내 인생이 엉망이 됐다고.”

불끈 쥔 주먹으로 동생의 통통하고 뽀얀 얼굴을 내갈겼다. 퍽하는 소리에 동생보다 내가 더 놀랐다. 머릿속에 몇 번 떠올린 적은 있지만, 실제로 동생의 턱을 날려버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 않은 녀석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렇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이 먼저 나갔다. 이제 와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라면 지금보다 완벽한 타이밍은 없을 터였다.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미…, 미안해.”

“뭐?”

“미안하다고, 엉망으로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뜻밖의 사과에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녀석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간 한 번도 동생에게서 들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실컷 두들겨 패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는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분노도 적개심도 가랑눈처럼 사라져 버렸다. 짠 바닷물을 많이 마셨는지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속이 메슥거렸다. 자꾸 헛구역질이 나왔다. 다 토해내면 속이라도 편할 텐데 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착한 사람은 아니어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다. 동생한테는 좀 못되게 굴어도 부모님에게는 착하디 착한 아들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께도 늘 칭찬받는 학생이었다. 엄마 등쌀에 떠밀렸지만 분리수거도 제법 잘하고 일회용품은 사용하지 않았다. 모범상을 줘도 모자란 마당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불행이 불쑥 인생에 끼어들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뚝뚝 떨어지던 눈물이 어느새 장맛비처럼 쏟아졌다. 우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목놓아 울자 동생은 더 서럽게 울었다. 누가 더 슬피 우는지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이 무지갯빛 바닷가에서 한참을 울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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