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섬 (5)

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by 조이홍

“형아, 우리 이제 어떻게 해?”

울기에도 지쳐갈 즈음 쩍 마른 목소리로 동생이 물었다. 눈물을 훔치니 멀리 수평선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기세등등하던 태양이 벌써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냥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낯선 장소에서 동생과 단 둘이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 뭘 해야 하는 걸까.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오래전, 한 떨기 꽃 같은 형들과 누나들이 바다에 가라앉은 사건 이후 생존 수영이라는 과목이 생겼다. 어떤 어른들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수영을 못하거나 물을 무서워하는 친구들에게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지진이나 화재 발생 시 대피요령이나 심지어 인터넷이 셧-다운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일 년에 한 번씩 연습했다. 갈수록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처럼 낯선 바닷가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지면을 향해 내리꽂는 롤러코스터에 앉은 것처럼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또 헛구역질이 나왔다. 이런 순간에도 태양은 수면 아래로 자비 없이 빨려 들어갔다. 열기가 한풀 꺾인 태양이 남기고 간 여운이 어스름 저녁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비참한 상황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었다. 멍하니 석양 감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오늘 밤을 보낼 방법부터 궁리해야 했다. 아무리 한여름이라도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질 터였다. 밤새 추위에 덜덜 떨지 않으려면 대책이 필요했다. 옷과 양말, 운동화를 제외하면 가진 거라고는 구명조끼가 전부였다. 태양의 크기와 반비례해 사방이 점점 어둑어둑해졌다. 손이 닿을 거리 정도만 겨우 보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래사장 뒤로 우거진 숲이 버티고 있지만, 그곳에는 발 디디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모래사장에서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다른 묘안도 없잖아.”

엄마 말고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다던 동생도 무시무시한 날짐승과 징그러운 벌레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법한 으스스한 숲에는 들어가기 싫은 눈치였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곳에서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이웃집 아이 혼나는 소리, 위층 아이가 거실을 운동장 삼아 뛰어다니는 층간 소음이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빛도 소리도 삼킨 고요함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호민아, 우리 노래 부를래?”

“갑자기? 노래할 기분은 아닌데.”

“그러니까, 기분 전환이라도 좀 하자고.”

“바닷가에서 자려면 모래부터 파야지. 낮 동안 햇볕에 데워져서 구덩이 파고 들어가면 기온이 떨어져도 그럭저럭 견딜만할 거야.”

놀란 토끼처럼 두 귀가 쫑긋했다. 동생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한 제안이었다. 중학교 과학 시간에 배운 게 기억났다. 여름에 모래사장이 있는 육지는 늦게 데워지고 늦게 식는다. 낮과 밤에 바람 방향이 바뀌는 원인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자면 밤바람도 피하고 체온이 떨어지는 것도 얼마간은 막아줄 터였다. 매일 뒹굴뒹굴하며 유튜브나 보는 줄 알았는데 뜻밖의 모습에 아연했다.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

“뭐가?”

“노래 부르자며?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 부르자고.”

어릴 때 둘이서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가사를 까먹어 매번 최영 장군에서 멈췄는데 신기하게도 단군 할아버지부터 화가 이중섭까지 긴 노랫말이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났다.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이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찬가라도 되는 것처럼 목청껏 부르고 또 불렀다. 위인들 덕분인지 어둠에 대한 공포도, 적막함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씩 떨쳐냈다. 손톱 사이에 모래 알갱이가 박혔는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손끝이 얼얼했다.

“목마르다. 배도 고프고.”

“나도. 내일 아침에 마실 물이랑 먹을거리부터 찾아보자.”

“알았어. 형아.”

“어? 그래.”

녀석이 내 말에 토 달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데 왠지 어색했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지금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지 잘 알았다. 마실 물도 먹을거리도 없다. 넷플릭스에나 나올 법한 재앙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이를 악물었다. 단군 할아버지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열두 번쯤 터를 잡는 동안 두 사람이 누울 만한 모래 구덩이가 완성되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덩이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모래 바닥이 등에 배겼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의 한가운데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흰 설탕을 뿌려놓은 것 같았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우주에 있다고 배웠지만, 실제로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형아, 엄마랑 아빠는 괜찮을까?”

“당연하지, 우리도 이렇게 멀쩡하잖아. 두 분도 아무 일 없을 거야.”

“무서워!”

“무섭다고 생각하면 더 무서워진대. 우린 하나도 안 무서운 거야. 알았지?”

“응.”

용감한 척했지만,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좁은 구덩이 안에 나란히 누웠으니 동생도 분명 미세한 떨림을 느꼈을 터였다. 어둠도 적막함도 무서웠다. 내일이 오늘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현실이 가장 두려웠다.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부모님도 걱정되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내일 아침은 눈의 여왕 잔소리와 등짝 스매싱도 좋으니 아늑한 내방 침대에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새 동생에게서 쉑쉑하고 숨소리가 들렸다. 무섭다더니 금세 잠들었다. 어둠 속을 더듬어 동생 손을 꼭 쥐었다. 사람 체온이 이렇게 따뜻한 줄 처음 알았다. 통통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머릿속으로 양을 세면 금방 잠든다는데 오늘은 아무리 많은 양을 세어도 잠들지 못할 것 않았다. 제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파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의식이 점점 또렷해졌다. 파도 소리가 점점 아득해지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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