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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Dec 09. 2019

카렌다를 아나요?

인생 수업

  국민학교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MBC <주말의 명화>와 KBS <토요 명화>는 빠뜨리지 않고 꼭 챙겨봤다. 지금처럼 다양한 채널은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특히 외국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영화 프로그램의 양대 산맥이었던 주말의 명화와 토요 명화의 애청자가 되었다. 아직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이었지만 흑백으로 본 <로마의 휴일> 어린 나에게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로마의 휴일은 인생 영화 중 하나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내 삶에 깊이 각인된 영화가 되었다. 

<홍콩영화의 세계로 인도해 준 영화, 천녀유혼>

  본격적으로 영화에 빠지게 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수업을 했는데 학교를 마치자마자, 때로는 청소도 땡땡이치고, 극장으로 향했다. 주로 홍콩영화를 두 편씩 (재)상영하는 중앙극장이 내가 찾는 곳이었다. 당시의 나는 천녀유혼(倩女幽魂, 1987)을 통해 홍콩영화의 바다로 뛰어들게 되었고, 그 후 영웅본색(英雄本色,1986), 첩혈쌍웅(牒血雙雄,1989) 등의 홍콩 르와르와, 성룡의 폴리스 스토리로 대표되는 아크로바틱 쿵후 영화, 양자경의 <예스마담, 1985>과 같은 액션물 등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당시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안 본 홍콩영화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 한류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것처럼 80~90년대는 홍콩영화가 우리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던 시기였다.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왕조현, 장학우, 알란 탐 등이 (이때는 아직 주성치에는 입문하지 못했다) 청소년의 우상이었다. 오죽하면 "싸랑해요 밀키스" 광고를 주윤발이 찍었겠는가. 아침 일찍 학교 갈 준비를 하던 나는 주윤발이 나오는 밀키스 광고를 보고 꺅~~~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왕조현이 손을 흔들며 뛰어 나오던 크리미 광고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주윤발 형님 덕분에 성냥개비 씹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 홍콩영화만 본 것은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영화에 대한 스펙트럼도 조금씩 넓어졌다.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 故 최진실 씨가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던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 1990> 같은 문제작이나 청소년 관람 불가라 볼 수 없었던 <연인, 1992> 같은 영화는 대학생으로 위장해 보러 가기도 했다. (물론 누가 봐도 고등학생이었지만 표를 받는 극장 직원이 눈감아 주었다) UIP 직배로 춘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랑과 영혼, 1990> 같은 영화는 서울에 올라와 보기도 했다. 행복에 대해서 고민해 보거나 정의를 내려본 적은 없지만 영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행복하다고 느끼던 시절이었다. 


  영화를 보는 그 자체가 행복이었지만 영화를 꼭 봐야 하는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바로 카렌다였다. 캘린더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겠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카렌다라고 불렀다. 카렌다는 손바닥 크기만 한 영화 포스터다. 지금은 극장에 가면 A4 크기 정도 되는 홍보물(리플릿)을 나누어 주지만 그 당시에는 카렌다를 나누어 주었다. 카렌다 모으기는 당시 중, 고등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카렌다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위상이 달라질 정도였다. 요즘 말하는 인싸의 기준 중 하나가 희귀 카렌다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지방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직배 영화들의 카렌다는 몇 천 원씩 거래되기도 했다. 당시 영화 관람료가 3천 원임을 감안하면 결코 만만한 가격이 아니었음에도 거래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도 정말 갖고 싶었던 <인디아나 존스> 카렌다 2장을 3천 원에 구입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깟 종이 쪼가리를 모으려고 돈 낭비를 한다고 쓴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디아나 존스 카렌다를 손에 쥔 나는 마치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물론 그 3천 원은 당시 용돈을 받지 않던 내게 큰돈이었다. 

  카렌다를 더 많이 모으기 위해 친구와 싸우기도, 친구에게 아쉬운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모은 카렌다들은 세월이 흘러 먼지가 뽀얗게 내려 않은 앨범에 들어가 다락방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몇 달 전에 우연히 다락방 청소를 하던 어머니가 발견해서 책장에 꽂아 두셨고, 내가 얼마 전에 집으로 가져왔다. 한 장 한 장 쳐다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때는 신줏단지처럼 모셔두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앨범에 관심을 보이던 준이 한번 보여달라고 했다. 함께 보면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준과 큐 형제에게도 영화를 많이 보여주는 편인데 준도 앞으로 극장 가면 본 영화의 리플릿을 챙겨 와 아빠처럼 모아 두겠다고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 한 장도 누군가의 시간과 기억이 담기면 특별해지기 마련이다. 아빠 나이가 되면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니 잘 모아 두라고 했다. 


  과잉(過剩)의 시대, 정보도 이미지도 넘쳐 나지만 흔한 종이 한 장에라도 담긴 추억은 나이 들어 억지로 먹는 종합 비타민보다 몸과 마음에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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