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정주민, 일어나. 7시 넘었어. 엄마 이제 안 깨워. 도대체 어젯밤에 몇 시에 잤는데 못 일어나는 거야!”
“5분만 더 잘게요. 엄마.”
엄마는 우리더러 거짓말하지 말라더니 매일 거짓말로 하루를 시작한다. 6시 50분으로 맞춰 둔 알람이 아직 울리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거짓말한다. 지난밤에 잠을 설쳐 한숨도 못 잤다. 악몽을 꾸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속에서도 꿈꾸고 있다는 걸 눈치챌 정도였다. 인공지능이니 사물인터넷이니 하는 초연결 시대에 IT 강국에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잠의 여운을 즐기며 주방에서 솔솔 풍겨오는 아침밥 냄새를 맡았다. 갓 지은 구수한 밥 냄새가 방안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웬일인지 아침부터 무척 배가 고팠다. 잠깐, 방안이 왜 이렇게 더운 거지? 꼭 뙤약볕 아래 누워있는 것 같잖아. 덥다 못해 살갗이 따갑다. 설마, 설마, 제발! 눈이 번쩍 떠졌다. 제길, 꿈이 아니었다. 아니, 어떤 게 꿈이고 어떤 게 현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내방 침대에서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으며 잠든 사이 나쁜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기필코 그래야만 했다. 젠장, 슬픈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깨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에서 억지로 눈을 떠 정신을 차리니 현실은 푹푹 찌는 모래 구덩이 속이었다. 정말 어딘지도 모르는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태양은 아침부터 열심히 일했다.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입안이 오랜 가뭄으로 바닥을 드러낸 저수지처럼 바짝 말라 침 삼키기도 힘들었다. 시원한 물 한 잔 준다면 당장 메피스토와 계약할 판이었다. 마실 물부터 찾아야 한다. 드르렁 코까지 골며 잠든 동생을 흔들어 깨웠다. 굵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용케도 깨지 않는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잠꼬대를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밤잠을 설쳤나 보다. 게으름뱅이는 좀 더 자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모래 구덩이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할아버지처럼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밤새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몸도 기분도 엉망인데 약 올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당장이라도 바닷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파도에 움찔대는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처럼 보여 포기했다. 사실 망할 쓰레기만 없다면 이곳도 꽤 괜찮은 해변이었다. 길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쓰레기 사이사이 비치는 푸른 바다는 여느 해수욕장 못지않았다. 조난당한 처지만 아니라면 물놀이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해수욕장이었다. 걱정하는 것만큼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닐지도 몰랐다. 태평양이나 대서양 한가운데도 아니고 이 정도 쓰레기가 모인 지역이라면 언론에서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8시 뉴스 특종감이 분명했다. 정의감에 불타는 유튜버들은 또 어떻고. 마실 물과 먹을거리만 찾는다면 구조대가 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쩌면 엄마, 아빠가 벌써 신고해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펼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똬리를 틀자 다 먹은 햄버거 포장지처럼 구겨진 몸과 마음이 반듯하게 펴졌다. 이곳이 섬인지 아닌지도 확인할 겸 우선 바닷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낯선 장소에서는 지형부터 익혀 두는 게 중요했다. 그르렁거리며 곯아떨어진 잠꾸러기를 뒤로하고 무지갯빛 바다를 따라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갔다 왔어? 자고 일어났는데 형아가 없어서 깜짝 놀랐잖아!”
“놀러 왔냐, 정호민! 이런 상황에도 늦잠이나 자고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더워서 일찍 깼어. 마실 물이랑 먹을거리도 찾고 주변도 둘려보려고 바닷가 좀 걷다 왔어. 마침 반대편도 둘러볼 참인데 같이 갈래?”
“그럼 일찍 깨웠어야지. 뭐 좀 찾았어?”
“딱히. 안 좋은 소식뿐이야. 가면서 이야기해 줄게.”
몇 마디 꺼내지도 않았는데 깊은 한숨과 동시에 수다쟁이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해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동생에게 전해 들었다면 나도 거친 맛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마실 물과 먹을거리는커녕 형형색색 쓰레기들의 천국인 바다와 절벽으로 꽉 막힌 해변만 두 눈으로 확인했다. 이 많은 쓰레기가 도대체 어디서 왔길래 이토록 너른 바다를 가득 채웠는지 소름이 다 돋았다. 태평양 어딘가에 한반도 몇 배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쓰레기 섬이 있다는데 혹시 이곳이 그 섬이 아닐까 하고 잠깐 의심도 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했다. 서귀포 앞바다에서 사고를 당하고 길어야 하루나 이틀 정도 바다에 표류하다 이 섬에 도착했을 터였다. 몸이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기껏해야 제주 먼바다에 있는 섬이라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설레발치기 선수가 풀 죽어 있으니 왠지 더 불쌍해 보였다. 녀석은 부산스럽게 떠들 때가 차라리 보기 좋았다.
“이제 겨우 한쪽만 본 걸. 반대편 해변도 살펴보러 가자. 실망할 것 없어. 어쨌든 사방이 바다니까 먹을거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거야. 물고기 박사 정호민이 있어서 난 하나도 걱정 안 되는걸.”
“정말? 하긴, 물고기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지. 나만 믿어. 뭐 해, 서두르지 않고. 가자.”
단순한 게 장기인 동생이 콧노래를 부르며 앞장섰지만, 반대편 해변도 상황은 똑같았다. 30여 분쯤 걸어가자 또다시 가파른 절벽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걸어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눈대중으로 재보니 얼추 15층 빌딩만큼 높은 절벽이었다. 게다가 직각에 가까운 바위는 칠판처럼 매끄러워 마땅히 잡을 곳도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예방 주사를 한 방 맞은 덕분인지 동생도 그리 실망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해변을 통해서 이곳을 둘러보는 건 불가능했다. 이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 시선이 동시에 숲을 향했다.
“숲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형아 생각은 어때? 갈 수 있겠어?”
“어? 그럼…. 피, 필요하면 들어가야지. 들어가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이런 상황에 벌레 따위가 뭐가 무섭겠어. 갈 수 있고말고.”
“오, 웬일이래. 날파리 한 마리만 봐도 기겁하는 사람이. 그럼 내가 앞장설게. 가자”
말은 호기롭게 뱉었지만,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솔직히 숲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동생 말처럼 벌레라면 질색했다. 사람마다 취약한 부분이 하나둘은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벌레가 그랬다. 한 번은 늦은 시간까지 시험공부하다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나방 한 마리에 아파트가 떠나갈 정도로 비명을 질러 잠든 엄마와 아빠를 깨운 적도 있었다. 잠에서 깬 게 우리 집만은 아니었는지 경비실에서 무슨 일 있냐고 연락이 오기도 했다. 잠에서 덜 깬 아빠가 인터폰으로 해명하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해가 뜬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음산한 숲 속에 뭐가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딱 봐도 벌레 천국이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이 터져 나왔다. 괴로운 마음을 알리 없는 동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숲 안쪽으로 성큼 들어갔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행여 동생을 놓칠까 봐 재빨리 뒤에 따라붙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