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사람은 나이 들지 않는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으로 이번 생에 좋은 남자(?)를 만난 아내가 참 부러웠습니다. 가정적이고 자상하며 아내바라기인 남편을 만났으니까요. 그럼 도대체 전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을까요. 이건 농담인 거 아시죠? 코로나 3년을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아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정반대일지도 모른다는…. 아들 둘 뒷바라지하는 게 장난이 아니더군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에 거친 말들이 담겼습니다. 태권도 도장은 근처도 가보지 않았다는데 날아 차기는 어찌나 일품이던지. 부모가 자식 뒷바라지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꼬맹이들이 만만치 않더라고요. "엄마, 안아주세요." 하던 천사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웬수(원수라는 표현이 옳지만 이 대목에서는 왠지 이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가 따로 없습니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아빠는 아이들의 실체(?)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입니다. 직장(사회생활)은 '정글'에 비유되는데 왜 육아는 '전쟁'에 비유되는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금융업계에 근무하다 플로리스트로 전업한 아내는 촉망받는 커리어 우먼이었습니다. 첫째를 낳고 남편의 꾐에 빠져 둘째까지 낳으면서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선 된 아내는 오롯이 육아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가족을 위해 꿈을 포기한 건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도 그랬지요. 아마 많은 부모들이 그랬을 테고요.
그런 아내가 요즘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인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증명하고 있습니다. 20여 년을 수영으로 단련한 아내가 꾸는 꿈은 바로 '인명구조요원(라이프 가드)'과 '노인스포츠지도사(수영)' 자격증 취득입니다. 꾸벅꾸벅 졸며 한 달여 동안 노인스포츠지도사 필기시험을 준비하더니 덜컥 합격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 정도로 공부했으면 'SKY'를 날았을 거라고 우스갯소리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니 제법 높은 점수로 패스했습니다. 모두가 최대 난관이라고 예상했던 필기시험을 한 방에 합격했으니 20년 수영인이 실기시험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 무지에서 나온 착각이었습니다. 아내의 라이프 가드 도전기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평생 다이어트했는데 2kg 이상을 뺀 적 없는 아내가 한 달 사이에 무려 4kg이나 뺐습니다. 이럴 때는 '뺐다'라는 표현보다 '빠졌습니다'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테지요. 사실 라이프 가드 실기시험은 지구와 화성 간의 거리만큼이나 우리가 아는 수영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입영(손을 물 밖으로 빼고 선 채로 치는 헤엄)이나 5kg 중량물 운반 같은 테스트는 수영 실력과는 완전 별개였습니다. 마스터즈(아마추어) 수영계에서 탑 티어까지는 아니더라도 피라미드 상단에 있다고 자신했던 아내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8시간 훈련을 받고 오는 주말에는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어떤 날은 식사하다 화장실로 달려가 그대로 토해내기도 했습니다. 변기를 붙잡고 있는 아내 등을 두드려준 게 얼마만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온몸에 파스를 달고 살았습니다. 그 와중에 필기시험도 준비해야 했지요. 뭘 그렇게 열심히 하나 싶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주중에는 부족한 과목을 보충하기 위해 별도 훈련까지 받았습니다. 지난 한 달은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물속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자존감 높고 자존심 강한 아내가 입영과 중량물 운반 훈련 내내 울었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앞에서도 잘 울지 않는 아내가 생판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울었다는 말에 가슴 한 켠이 아렸습니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도 돼"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습니다. 훈련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등록 인원 60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습니다. 집안 살림과 아이들 돌봄은 모두 제 몫으로 돌아왔지만 사실 아내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꿈을 향해 나아가는데 보탬이 된다면 뭔들 못할까요.
지난주 라이프 가드 시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과연 결과는……. 60초 후에 공개합니다가 아니고, 합격! 네, 그렇습니다. 한 방에 합격했습니다. 아내가 그 어려운 걸, 젊은 남자들도 상당수 포기한 걸 해냈습니다. 함께 인명구조요원 과정을 들은 사람들과 전우애가 생겼다며, 왜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를 그렇게 주구장창하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아내가 대견했습니다. 수영 실력이라면 아내보다 한 수 위인 아이들이 "그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니야?" 빈정대자 360도 돌려차기를 시전 하는 아내가 참으로 멋져 보였습니다. 아마 저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테지요.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꿈꾸는 사람은 나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반면 왜 요즘 제 흰머리가 자꾸 늘어나는지도 덩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아내의 꿈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생활체육 노인스포츠지도사 시험을 준비 중입니다. 수영 기록을 무려 7초나 단축해야 하고(1초 단축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수영인이라면 잘 알 테지요), 구슬 시험이 빡세기로 유명하지만 아내는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난 주말에 셀프로 한약을 지어 왔습니다. 눈치껏 보약 한 재 지어 먹여야 했는데 제가 넋 놓고 있었지 뭡니까. 이번에도 한 번에 패스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입니다. 다시 2주 동안 피, 땀, 눈물을 쏟아야 할 아내가 자랑스럽습니다. 자격증을 취득해서가 아니라 도전하는 그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건 아마도 저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