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섬 (8)

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by 조이홍

높은 곳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처음부터 길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없으니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눈에 띄는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기만 하면 됐다. 물론 중력을 거스르는 데에는 큰 고통이 따랐다. 열매 덕분에 회복한 체력도 진작에 바닥을 드러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발 달린 짐승처럼 기어서 산을 올랐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엄마 덕분에 하루도 빠짐없이 수영장에 갔다. 새벽마다 깨우려는 자와 더 자려는 자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승자는 언제나 깨우는 자였다. 투덜거리며 집을 나서도 50분 동안 쉬지 않고 수영하면 몸이 깃털처럼 개운했다. 신기하게도 수업 시간에 집중도 더 잘됐다. 엄마 고집 덕분에 나도 동생도 체력만큼은 또래보다 훨씬 좋았다. 그 체력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다.

“형아, 저기 봐. 저기! 하늘이야.”

마침내 온전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내달렸다. 가파른 오르막이라 의지만큼 빨리 달릴 수 없었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온종일 숲을 헤매느라 쓰러지기 직전이었는데 초인적인 힘이 발휘됐다. 삼림욕이란 숲에서 좋은 기운이 나와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해 주는 것이라는데 그건 숲을 헤매보지 않은 사람이 내린 정의가 틀림없었다. 오늘처럼 숲을 헤매면 치료는커녕 없는 병도 생길 지경이었다. 거친 말을 한바탕 내뱉으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끝이 보였다. 저 고개만 넘으면 눈 부신 태양과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과 다시 만날 수 있다. 마침내 이곳의 정체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제 지긋지긋한 절망과도 안녕이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하늘이 서럽도록 맑고 푸르렀다. 앙증맞은 양털 구름 하나가 막 머리 위를 지나갔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풍경이었다. 이제 겨우 지형을 파악했을 뿐이지만, 가슴이 자꾸만 벅차올랐다. 동생은 아까부터 기분 좋을 때만 추는 괴상한 춤에 흠뻑 취했다. 힘이 남았는지 쌩쌩했다. 몇 번이나 고비를 겪었지만 결국 정상에 섰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누군가 기뻐서 흘리는 눈물은 짜지 않다고 해서 살짝 맛을 봤더니 정말 달큼했다. 거짓 달콤함이라도 좋았다. 순간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손이 허공에서 경쾌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소년 만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정상에서 보이는 건 온통 검푸른 섬과 알록달록 총천연색 바다뿐이었다. 마치 전 세계 쓰레기가 이곳에 모인 것처럼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쓰레기더미가 사방에서 섬을 향해 꾸물꾸물 기어 왔다. 시선이 닿는 곳에 육지나 다른 섬은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로 둘러싸인 완벽한 무인도였다. 어느 쪽이든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곳이 무인도일 거라는 추측은 첫날 눈뜬 순간부터 쭉 해왔다. 다만 사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비로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바다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온종일 숲을 헤매느라 고생했다고 섬이 주는 선물이었다. 바람 덕분에 후끈 달아오른 몸도 마음도 조금씩 차분해졌다. 섬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려고 정상 둘레를 몇 바퀴나 돌았다. 처음 출발한 해변에서 석양을 보았으니 그 방향이 서쪽이었다. 서쪽 해변은 긴 절벽이 성벽처럼 양쪽을 에워쌌다. 서쪽을 등지고 정면이 동쪽이고 왼쪽이 북쪽, 오른쪽이 남쪽이었다. 북쪽은 거리도 멀고 가파른 바위와 절벽으로 이어져 걸어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남쪽은 갈수록 완만한 지형이었지만 숲이 울창해 무시무시해 보였다. 더는 숲에서 헤매고 싶지 않았다. 반면 동쪽에는 백사장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거리도 가장 가까웠다. 기분 탓인지 쓰레기도 적어 보였다.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우리 둘이 머물기에는 동쪽 해변이 최선이었다. 쓰레기만 걷어내면 물고기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온종일 죽도록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어스름 저녁이 다 되어 동쪽 해변에 도착했다. 내리막이라 별로 힘들이지 않고 숲을 통과했다. 중간에 무성하게 자란 열매 덩굴을 발견하는 행운도 따라주었다. 허겁지겁 열매를 입안에 밀어 넣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각자 양말에 열매를 가득 채웠다. 이번에도 동생은 덩굴 주위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이정표를 만들었다. 뜨거운 햇볕에 데워진 모래가 아직 따뜻했다. 갓 구운 빵 위에 올려놓은 버터처럼 모래사장 위에 걸터앉은 몸이 자꾸 녹아내렸다. 열기를 가득 품은 여름 바람이 자장가를 싣고 왔는지 얼굴에 스칠 때마다 졸음이 몰려왔다.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힘들다는 말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길고 긴 하루였다. 내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라면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동생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아마 혼자였다면 섬의 반대편에서 여전히 울고 있을 터였다. 이제 시작이다. 마실 물도 찾고 잠잘 곳도 마련해야 한다. 불도 피우고 물고기도 잡아야 한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야 한다. 물론 내일부터. 오늘은 할 만큼 했다. 서둘러 구덩이를 팠다. 한국을 빛낸 백 명의 위인들을 부를 기운은 없었다. 졸려서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동생이 나뭇가지와 덩굴을 구해와 어설픈 덮개를 만들었다. 첫날밤 새벽이슬에 잠을 설쳤다나.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더니 그게 누구 엄마냐고 묻는 녀석 덕분에 모처럼 소리 내 웃었다. 농담하는 걸 보니 동생도 한결 마음이 편해진 듯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나란히 누워 산딸기를 먹었다. 이번에는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나뭇잎 사이로 노란 달빛이 내려앉았다.

“형아, 내일은 물고기 잡자. 물고기 잡는 건 자신 있어.”

“그래, 물고기도 잡고 마실 물도 찾아야지. 내일부터 할 일이 많을 거야. 빨리 자.”

“엄마 보고 싶다.”

“......”

“형아 자? 잘 자.”

이제 더 나올 눈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엄마라는 한 마디에 울컥했다. 눈치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약해지면 안 된다. 엄마가 말했던 동생을 보살펴주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동생을 돌보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기도 했다. 엄마가 바란 건 일방적인 희생이 아니라 서로 돕고 의지하라는 의미였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몇 배 더 강해져야 한다. 돌아눕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억지로 몸을 돌렸다. 후덥지근한 밤공기에서 엄마 냄새가 났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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