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무지개 섬에서 처음 늦잠을 잤다. 어젯밤 내려앉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모래 구덩이를 팔 때 뜬금없이 동생이 섬에 이름을 붙여주자고 제안했다.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몇 초간 침묵이 계속되다 거짓말처럼 두 사람이 동시에 '무지개 섬'이라고 외쳤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난장판이 돼버렸지만, 이름만큼은 근사하게 지어주고 싶었다. 누군가 버린 쓰레기가 이곳으로 모인 셈이니 사실 섬은 아무 잘못도 없었다. 멋진 이름 하나 가질 자격은 충분했다. 처음 이름을 갖게 된 섬에서 모처럼 한 번도 깨지 않고 잤더니 몸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뜨거운 여름 햇살에 못 이겨 깼지만, 여전히 아침나절이었다. 시계가 없어도 태양이 어디쯤 떠 있는지로 시간을 짐작했다. 한껏 기지개를 켜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림잡아도 수십 킬로미터는 족히 넘는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군데군데 검은 바위만 눈에 띌 뿐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았다. 어젯밤 구덩이를 팠던 자리 근처에 생기 잃은 회색 나무 한 그루가 힘없이 누워있었다. 오래전에 말라죽은 듯했다. 그 뒤로 작은 언덕이 모래사장과 숲의 경계였는데 이름 모를 나무들과 덩굴이 마치 선을 그어놓은 듯 줄지어 있었다. 시선을 바다로 옮기면 한숨부터 나왔다. 색깔도 다르고 모양도 제각각인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무리를 지어 떠다녔다. 가만히 보니 엊저녁에 도착했을 때보다 물이 빠져 있었다. 썰물 때였다. 바다에는 물고기나 조개도 있을 것이고 운이 좋으면 다른 먹을거리도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지끈지끈한 머리도 식힐 겸 바다에 발을 담갔다. 발끝을 간지럽히는 바닷물이 시원했다. 발로 쓰레기를 이리저리 밀어내니 바닷물은 맑고 투명했다. 다행이다. 깨끗한 바닷물에 발을 담그자 갑자기 수영하고 싶어졌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인데 쓰레기 때문인지 그간 수영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더랬다. 킁킁거리며 몸 구석구석을 냄새 맡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퀴퀴한 냄새에 속이 메슥거렸다. 땀과 눈물에 찌든 옷에서 매캐한 냄새가 났다. 물속에 그대로 떠 있으면 쓰레기와 구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더 더러울지도 몰랐다. 이참에 더러운 옷도 빨아 두면 좋을성싶었다. 이리저리 쓰레기를 밀어내자 에메랄드빛 바다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눈 깜짝할 사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벌거벗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티셔츠와 반바지, 팬티를 물에 넣어 마구 비벼댔다. 처음 하는 동작이 자연스러워 순간 움찔했다. 한참을 비벼대도 시커먼 구정물이 계속 나왔다. 엄마가 아기 같다고 부러워하던 뽀얀 피부가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해졌다. 옷을 털어 갯바위에 말리려는데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해 돌아보니 벌레 먹은 사과를 한 입 베어문 표정으로 동생이 서 있었다.
“형아, 변태야? 홀딱 벗고 뭐 하는 거야?”
“훔쳐보는 네가 변태지. 너도 좀 씻어. 진짜 개운해.”
“내가 미쳤어? 싫거든.”
말은 싫다고 하면서 녀석이 나와 같은 상태가 되는데 3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수영대회에 참가한 동생도 또래에 비하면 수영을 잘했다. 물론 형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해수욕장에 물놀이하러 온 아이들처럼 신나게 웃고 떠들며 물장난쳤다. 잠깐이지만 이곳이 무인도라는 사실조차 잊었다. 혼자서도 잘 노는 동생이 바닷속을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모래사장에 내팽개친 옷을 집어 들었다. 녀석 옷에서도 고린내가 진동했다. 이런 옷을 입은 녀석과 어떻게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잠들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세게 옷을 비벼댔다.
“뭔 일이래, 형아가 내 옷까지 빨아주는 거야?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좋아, 그럼 난 이걸로 보답할게. 짜잔!”
잠깐 잊고 있었지만 동생이 눈앞에 들이민 건 무척 익숙한 물건이었다. 무더운 날씨에 몇 통이고 비워냈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게 뭐야, 삼다수야?”
“어, 쓰레기더미 속에서 발견했어. 뚜껑도 따지 않은 새 거야.”
“사, 삼다수 유통 기한이 얼마나 되지? 무, 무라벨 제품은 병에 표기되어 있을 텐데.”
어찌나 놀랐는지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온몸에 돋은 닭살로 진짜 닭이 될 것 같았다. 쓰레기더미에 쓸만한 게 있을지 제대로 살펴보려던 참이었는데 덜컥 생수를 발견하다니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보다.
“내가 벌써 확인했지. 2032년 10월까지니까 아직 1년도 더 남았어. 마실 수 있는 물이야.”
“야, 정호민!”
동생을 덥석 안아 주려다 움찔했다. 흥분해서 둘 다 태어날 때 모습 그대로라는 걸 깜빡했다.
“목말라 죽겠어. 빨리 마시자.”
동생 성화에 못 이겨 벌거벗은 채 생수병 뚜껑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드르륵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생수 뚜껑 돌리는 소리가 이렇게 반가운 줄은 몰랐다. 뚜껑이 모래에 떨어지지 않게 오른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삼다수에서 익숙한 문명의 냄새가 풍겼다.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고 동생에게 건넸다.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붉은 열매로 겨우 목을 축였으니 무더위에 얼마나 목이 탔을까. 그만 마시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밀어 넣었다. 설마 다 마시는 건 아니겠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3분의 1만 비웠다. 내 차례였다. 눈을 감고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한 물이 목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무 맛도 없는 물이 달곰했다. 눈을 떴다. 두 번째는 벌컥벌컥 넘겼다. 식도에서 푸른 바다가 넘실거렸다. 꼭 쥐고 있던 뚜껑으로 생수병을 막았다.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든지 손바닥에 벌겋게 자국이 새겨졌다. 그래도 아직 물이 절반이나 남았다.
“이제 무얼 하지, 형아?”
"음…. 그래 불, 불부터 피워야지. 물고기도 잡고. 할 일이 많은 걸."
“좋아 그럼 나는 바다를 맡을게. 쓰레기 속에서 쓸만한 물건도 찾아보고 물고기도 잡을게. 형아는 불을 피워.”
“좋아. 그럼 난 숲에서 마른 풀이랑 불쏘시개 할만한 나뭇가지부터 구해올게.”
“그런데 우리 좀 멋지지 않아, 형아? 꼭 재난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잖아.”
“적당히 해라, 정호민. 그러기에 니 몸이 너무 아기 같지 않니? 옷부터 입어. 아무튼, 너무 나대지 말고, 위험한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무지개 섬에 온 이후로 동생은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솔직히 누가 누구를 보살피는지 잘 모르겠다. 상관없었다. 서로에게 기대어 구조될 때까지 버티면 된다. 쨍쨍한 햇볕과 후덥지근한 바람 덕분에 바위에 널어놓은 옷들이 금방 말랐다. 시큼한 땀 냄새가 한껏 밴 옷에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더해졌다. 그 냄새가 왠지 싫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