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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섬 (10)

픽스-업 소설 지구연대기(파트 2)

by 조이홍

“에이, 18!”

머릿속에 맴돌던 거친 말을 드디어 내뱉고 말았다. 끝이 뭉뚝해진 막대기가 무척 고집스러워 보였다. 꼴도 볼기 싫어 바다를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던 막대기가 모래사장 한가운데 뚝 떨어졌다. 얼마나 꼭 쥐었던지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게으름 피우는 태양이 오늘도 모래사장을 달구었다. 후끈 달아오른 프라이팬 위 버터 조각처럼 불 피우리라는 다짐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땔감을 구하러 숲 안쪽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사람 손길이 닿은 적 없는 섬이라 몇 걸음만 걸어도 나뭇가지와 마른 잎이 발에 차일 정도였다. 아무런 도구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불 피울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단단한 나무를 문질러 마찰력으로 불씨를 얻는 것이었다. 찜통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시간 넘게 막대기를 나무판에 문질렀다. 처음 5분은 그런대로 할만했다. 곧 불씨를 얻으리라는 희망이 연료가 되었다. 나란 사람이 이토록 끈기가 없었나 실망하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굵은 땀방울이 모래 위로 뚝뚝 떨어지자 연료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점점 팔이 끊어질 것 같더니 나중에는 감각조차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손을 바꾸고 자세를 고쳐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불씨는커녕 연기조차 피어오르지 않았다. 온몸에서 솟아난 땀 때문에 어느새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뱃속에서 산딸기를 내놓으라고 줄곧 요란한 신호를 보냈다.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소년 만화 주인공은 내 몫이 아니었다. 때마침 바닷가에서 검게 그을린 재난 영화 주인공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려왔다.


"형아, 이것 봐봐! 굉장하지?"

동생이 폐그물에 쌓인 쓰레기를 자랑하듯 펼쳐 보였다. 쓸 말한 걸 찾아보겠다더니 말 그대로 쓰레기뿐이었다.

"뭐야, 멀쩡한 건 하나도 없잖아. 이런 걸 어디에 쓰려고?"

"역시 형아는 헛똑똑이라니까. 상상을 해 봐. 상상을. 이것들만 잘 사용하면 이제 먹을거리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그래? 어디, 이 빠진 훌라후프, 망가진 우산, 짝짝이 운동화, 한쪽 알 없는 물안경, 비닐봉지, 그리고 찢어진 그물로 상상왕 정호민 군은 뭘 할 수 있을까?"

순간 음흉한 미소를 짓는 녀석, 오랜만이다, 저 꼴 보기 싫은 얼굴.

"끌쎄. 두고 봐. 그나저나 형아는 불 피운다더니 왜 애꿎은 막대기한테 화풀이하는 거야?"

"화풀이는 무슨. 말 돌리지 말고 계획이나 어서 말해 봐."

"아까 형아가 말했잖아. 불 피우고 물고기도 잡자고. 이제부터 그걸 해야지."

"장난하냐? 어떻게 할 거냐고?"

"좋아, 그럼 이 몸이 형아가 실패한 불부터 피워볼까? 불쏘시개 할 마른풀은 충분히 모아뒀지?"

말 끝나기 무섭게 동생은 하얀 비닐봉지를 챙겨 바닷가로 달려갔다. 편의점에서 물건 살 때 담아주는 흔한 비닐봉지였다. 절반쯤 물을 채운 비닐봉지 안에서 일곱 색깔 무지개가 빛을 발했다. 순간 컴컴한 망망대해에 한 줄기 서광이 비추는 듯했다.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온통 차지했다. 돋보기. 동생은 하얀 비닐봉지를 돋보기 삼아 마른풀에 불을 붙이려는 거다. 도대체 저런 걸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이제 동생이 대단하다 못해 존경스러웠다. 5분이나 지났을까. 마른풀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반딧불이 같은 불씨가 여기저기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불을 피웠다. 시뻘건 불꽃이 경쟁하듯 타올랐다. 불 피우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던가. 한 시간 넘게 고생해도 얻지 못한 걸 동생은 단 5분 만에 해냈다. 이쯤 되면 생존의 달인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동생의 활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빠진 훌라후프와 짝짝이 운동화에서 얻은 운동화끈, 그리고 폐그물은 어엿한 족대로 다시 태어났고, 망가진 우산에서 얻은 우산대는 물고기를 구워 먹을 꼬챙이로 변했다.

"어때. 이만하면 훌륭하지? 이제 물고기 잡으러 갈 건데 형아도 같이 갈래?"

남은 한쪽도 반쯤 금이 간 물안경을 쓰며 동생이 말했다.

"어? 그럼, 같이 가야지. 난 뭘 하면 될까?"

"내가 물속에서 물고기를 몰게. 형아가 족대로 잡아. 아까 쓰레기 더미 뒤지다 보니 물고기가 제법 있더라고. 빨리 가자. 배고파 죽겠어."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어느새 반대편 해안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탁탁 소리를 내는 불꽃이 누가 더 뜨거운지 태양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거침없이 타올랐다. 나뭇가지를 한 줌 쥐어 불속에 넣고 얼른 동생을 뒤쫓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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