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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게 행동할까?

by 조이홍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기에 우리는 또한 용서합니다. 나도 언젠가 실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실수가 무슨 벼슬은 아닙니다. 실수하면 부끄러운 줄 아는 것도 역시 사람입니다. 이를 '염치있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습니다.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 머리가 지끈하고 몸이 찌뿌둥한 이유 아니겠습니까.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에 인류는 지구에서 가장 강한 종(種)이자 가장 다정한 종이 되었습니다.


요즘 소위 똑똑한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예능 프로그램 다 망하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돕니다. 처음 한 번은 실수려니 했는데 자꾸자꾸 반복합니다. 하다 하다 수족관물까지 마십니다. 도대체 왜 저렇게 행동할까 궁금했습니다. 그냥 웃어넘기거나 무관심으로 대하면 마음이 편할 텐데 제 성격도 참 까탈스럽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고나 할까요. 분명 이 행동들을 설명해 줄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가물가물, 가뭄가뭄 미칠 것만 같습니다. 재빨리 챗GPT한테 달려갔습니다. 이런, 괜히 헛수고만 했습니다. 챗군은 아직 학습이 더 필요해 보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필요한 순간에는 역시 '독서'가 최고니다. 제게는 말입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지금 읽고 있는 유시민 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에서 실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암흑 같은 망망대해에서 앞을 환하게 비춰주는 등대를 만난 듯했습니다. 옳거니, 무릎을 탁 쳤습니다. 도대체 왜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행동을 할까요? 열쇠는 바로 '이기적인 유전자'가 쥐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를 읽은 유시민 작가는 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를 'ESS 모델'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ESS는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Evolutionarly Stable Strategy)'를 줄인 말입니다. ESS는 어떤 군집의 대다수 개체가 일단 선택하면 다른 모든 전략을 능가하는 전략입니다. 자연선택은 ESS를 벗어나는 전략을 징벌합니다. 때로는 둘 이상의 전략이 '집단적으로 안정한 전략(Collectively Stable Strategy)'이 되기도 합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모기한테 물렸는데 옆사람 허벅지 긁는 소리냐고요? 사례를 살펴보면 무척 쉬운 이야기입니다.


혁명을 통해 소련 공산당은 권력을 완전히 독점했습니다. 모든 기업을 국가 소유로 만들었고 농촌을 사회주의 집단농장으로 개조했습니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모두에게 일자리를 주었지만 열심히 창의적으로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동일한 보상을 주었습니다. 이제 소련 인민에게 선택 가능한 적응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이를 '성실'과 '태만'이라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쪽이 적응의 이익이 클까요. 즉 어느 전략이 생존에 유리할까요? 설명하면 입만 아플 테지요. 바로 '태만'입니다. 성실하면 몸만 축나니까요. 결과적으로 태만이 소련의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되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태만을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요. 결국 소련은 미국이 아니라 인간의 생몰학적 본성에 패한 것입니다(이상은 유시민 작가의 책 141~143쪽을 요약한 것입니다).


둘 이상의 전략이 집단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되기도 한다고 말했지요. 이를 작금의 상황에 빗대어 '상식'과 '엉뚱'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상식을 적응 전략으로 선택할 경우 엉뚱을 선택하는 개체는 막대한 적응 이익을 얻습니다. 로또 1등 당첨자가 천만 명일 때와 한 명일 때 당첨금 차이가 얼마나 나겠습니까. 즉각 생존(정치 생명)에 유리한 고지(공천)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개체는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기계일 뿐이니 생존에 유리하다면 인천 앞바다 짠물 한 잔쯤이야 벌컥벌컥 마시는 게 무에 그리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어제 내뱉은 말을 오늘 처음 듣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테지요. ESS 모델 하나로 현실에 일어나는 웃픈 상황을 대부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니 연민이 들기도 합니다. 개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그저 유전자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인데요.


그렇다면 이기적인 유전자는 모든 잘못이나 악행에 면죄부가 되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의 오류일까요.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기계, 개체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영혼이나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입니다. 유전자는 분명 이기적이지만 유전자의 총합인 인간이 언제나 이기적인 건 아닙니다. 얼굴도 모르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재산이나 목숨을 내놓는 숭고한 희생을 우리는 숱하게 지켜봐 왔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이나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요? 태초에 원시 수프 속에 자기 복제가 가능한 최초의 유전자가 생겨났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연인지 운명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오늘날 과학계에서는 유전자에게 생각도 감정도 없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렇지만 그때도 그랬을까요. 무한한 시간의 공백을 이런 상상으로 채워봅니다. 원시 수프를 헤엄치던 최초의 유전자가 지독한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마음을 분리해 버렸다고 말입니다. 다행히 잘려 나간 마음 역시 자기 복제가 가능했습니다. 비록 원형보다 복제 능력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요. 이기적인 유전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마음은 브레이크 역할을 합니다. 마음(영혼)은 진화의 오류가 아니라 태초 유전자의 일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드물게 이기적인 유전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역사는 (이기적) 유전자와 (공감하는) 마음의 투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기적인 유전자에 나를 맡기지 말고 때로는 마음이 나를 지배하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인류는 지금보다 더 다정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더 현명해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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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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