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브런치에 열심히 글을 올렸습니다. 제주 한 달 살기를 기록한 글부터 가족 에세이 어머니의 식탁, 한 평 텃밭의 사계절, 세 번 읽는 그림책 등과 같은 일상의 기록들, 한뼘소설과 열단어소설, 그리고 지구연대기까지 부족하지만 소설도 썼습니다. 그런 제게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라는 배지가 달렸습니다. 저는 '창작자(소설가)'이고 싶었는데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다고 합니다. 예전에 쓴 단편들을 리라이팅해 올리기로 했습니다. 창작 분야로 이사 가고 싶은 사심일 뿐만 아니라 연이은 폭염과 초강력 태풍 때문에 뒤숭숭한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글 쓰는 사람의 역할은 그가 발 딛고 사는 세상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라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머리가 지끈하면서도 글 쓰는 까닭일 테니까요.
2030년 7월.
민준은 신경질적으로 계기판을 조절해 에어컨 바람 세기를 최대치로 높였다. 구멍 난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기계음이 들리더니 차가운 공기가 순식간에 신형 아이오닉 9를 삼켰다. 운전대에 올려 둔 손이 얼얼할 만큼 냉기가 가득해지자 뾰족했던 마음이 조금은 뭉툭해졌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인간도 에어컨과 떨어져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 계절의 경계가 흐리터분해진 요즘, 1년에 절반을 소리 없이 울부짖는 에어컨만이 유일한 구세주였다. 오죽하면 '인간은 어머니에게서 나서 에어컨 곁에서 죽는다'라는 자조적인 농담이 유행했다. 24시간 쉬지 않고 작동하는 에어컨은 가전제품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고지식한 태양은 한순간도 게으름 피울 줄 몰랐다. 단단히 작정한 듯 맹렬하게 내리꽂는 열기에 시커먼 아스팔트가 피자 위 모차렐라 치즈처럼 스르륵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참 애쓴다고 민준은 혼잣말했다. 지난밤 지독한 열대야로 잠을 설쳤다. 살인적인 더위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더운 여름으로 기록되리라는 뉴스가 연일 SNS를 도배했다. 지난해에도, 그 지난해에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뉴스가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양치기 소년과 늑대’ 우화처럼 사람들은 점점 날씨와 관련한 뉴스를 믿지 않았다. 더 더워지면 에어컨을 그만큼 더 세게 그리고 더 오래 틀면 그만일 뿐이라고 집단 최면에 걸리는 쪽을 택했다. 어제도 괜찮았으니 오늘도, 내일도 괜찮으리라는 무관심 속에서 위태로운 일상이 계속되었다. 진한 풍미와 황금색 크리마가 매력적인 카프리치오를 두 잔이나 연거푸 마시고 차가운 물에 샤워까지 하고 나온 민준은 자꾸만 아래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려 안간힘을 썼다.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교통 정체가 그의 노력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월요일 출근길 정체야 반려인 손에 이끌려 애견 유치원으로 등원하는 강아지들도 다 아는 사실이라 두 시간이나 일찍 집을 나섰다. 아마도 죄다 민준과 같은 헛된 희망을 품었나 싶었다. 8차선 도로에 꼬리에 꼬리를 문 자동차들이 아이폰 23 출시를 기다리는 긴 행렬처럼 끝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 넘도록 속절없이 껌뻑거리는 신호등에 신물 난 민준은 P2P 대출회사 'Pooma-E'라는 스타트업을 주목받는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시킨 전설적인 기업인의 성공담을 담은 <그냥 하라!>라는 제목의 오디오 북을 멈추고 실시간 교통 상황을 전해달라고 시리(Siri)에게 투정 부렸다. 주인의 기분을 눈치챈 영리한 AI가 군소리 없이 ‘이 시간 교통 정보’ 앱을 작동시켰다.
“인류 건강, 동물 복지, 지구환경에 이바지하는 대안육 브랜드 클래버 미트와 함께하는 이 시간 교통 정보입니다. 아, 정말 힘든 월요일 아침입니다. 출근길 정체를 피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운전자분들은 지금 무슨 상황인지 의아해하실 듯합니다.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간선도로에 빨간불이 들어왔습니다. 올림픽대로나 강변북로도 마치 거대한 주차장을 연상케 합니다. 동부간선도로 성동교 아래 자율 주행 화물차끼리 충돌하는 사고까지 나면서 강변북로 이촌동 부근에서 성수 방향으로 차량 흐름이 사실상 끊긴 상태입니다. 내부 순환로 길음동 부근에는 고장 난 전기차가 흐름을 방해해 신내동에서 신영동 방향으로 진행도 무척 더딥니다. 성산대교 건너 도심 진입도 지체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부 순환로 홍은동까지 꽉 막혀있고 옆으로 성산로도 마포구청에서 이대 후문까지 긴 구간 정체입니다. 이 같은 출근길 정체 원인은 어젯밤 발생한 블랙아웃 때문입니다. 한국전력공사가 긴급 복구팀을 투입했지만, 여전히 도심 일부에서 정전 사태가 계속되고 있어 교통 신호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출근 준비 중인 분들은 이 점 참고하셔서 긴급 복구된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 시간 교통 정보 AI 기상 캐스터 김나연이었습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매력적인 AI 기상 캐스터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우울하게 들렸다. 민준은 운전대 위로 머리를 풀썩 떨어뜨렸다. 정말 뜨거운 여름이었다. 사상 최대 폭염이 지구촌을 강타하더니 며칠 전부터 유럽 몇몇 국가가 블랙아웃에 시달린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바로 어제 오후 행정안전부의 한 고위 관료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정부가 블랙아웃에 철저한 대비를 해 두었다고 호기롭게 장담했는데 1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대규모 정전이 그가 사는 부자 동네를 포함해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을 마비시켰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규모 시설물 가동도 하지 않은 한밤중에 말이다. 만약 블랙아웃이 한낮에 발생했다면 엄청난 재앙으로 번졌을 게 분명했다. 민준은 차라리 모두가 잠든 밤에 벌어진 사고가 다행이라고 여겼다. 정전의 여파라고 해봤자 냉장고에 보관해 둔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녹아버렸다거나 출근길 정체가 고작일 테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유럽에 비하면 형편이 나았다. 올해는 특히 유럽에서도 고위도 지역에 자리 잡은 노르웨이가 이상 기온으로 몸살을 앓았다. 지구 평균 기온이 1.5℃나 상승하면서 이상 고온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이번 여름에는 수도 오슬로가 기온 관측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40도를 기록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7월 평균 기온이 20℃ 안팎이었던 북유럽의 도시가 역사상 최고 기온을 기록하자 전 세계 언론들이 ‘노르웨이가 녹고 있다’라는 자극적인 기사를 앞다퉈 내보냈다. 사실 참혹한 현실에 비하면 기사 제목은 순한 편에 속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에 철도 선로가 뒤틀려 열차가 전복되는가 하면,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에서는 활주로 일부가 순식간에 부풀어 올라 항공기 운항이 전면 중단되었다. 운송 수단이 멈추자 연이어 물류 대란이 일어났다. 식량과 생필품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는 터라 재난은 또 다른 재난을 촉발했다.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인 적색경보를 발령해 학교를 휴업하고 관공서와 기업은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시민들은 미봉책에 불과하다며 분노했다. 노르웨이 가정 대부분이 에어컨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몇 곱절은 비싸게 팔렸지만, 그나마도 금방 바닥이 드러났다. 수요가 많지 않아 재고를 보유한 매장이 많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폭염으로 일만 명 이상 숨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몇 해 전부터 북유럽에서도 이상 고온으로 사망자가 발생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죽은 이들 대부분이 기후 약자였다. 가난한 이들에게 폭염은 암이나 바이러스보다 가혹했다. 케임브리지대 실존위기연구센터에서 근무하는 한 기후 전문가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불과 3년 전에 스웨덴이 겪은 고통을 이번에는 노르웨이가 고스란히 겪는다며 지구 온난화에 따른 이상 기후 현상이 인류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그리고 더 불규칙하게 닥치리라 경고했다. 아울러 지금이라도 각국 정부와 기업들, 그리고 개인이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면 3년 후에 ‘핀란드가 녹고 있다’라는 뉴스는 보지 않으리라는 간절한 소망도 함께 전했다.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자동차 경적에 화들짝 놀란 민준은 미어캣처럼 머리를 곧추세워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겨울잠 자는 반달가슴곰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던 자동차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정체가 풀리는 듯싶었다. 자율 주행 모드로 맞춰둔 신형 아이오닉 9가 호수 위 소금쟁이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유난히 걱정하던 아버지를 둔 덕분에 그 역시 어릴 때부터 탄소발자국을 지우는 데 익숙했다. 여전히 여러모로 불편한 전기차를 타고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에는 비건 식단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주말이면 마음 맞는 달리기 크루들과 쓰담달리기로 운동도 하고 거리도 청소했다.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려고 에코백과 텀블러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 행동이 유별나다는 듯 색안경 끼고 바라보던 직장 동료들도 하나둘 그에게 탄소발자국 줄이는 방법에 관해 물었다. 민준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궁금했다. 그가 태어난 이래 지구 평균 기온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상승했다. 자신과 동료들처럼 탄소발자국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는데도 지구는 계속 뜨거워졌다. 미래가 이미 정해진 양 블랙홀처럼 현재를 빨아들였다. 정말 인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걸까. 민준은 무슨 수를 써도 풀려날 수 없는 탈출 마술 한가운데 있는 실패한 마술사가 된 것 같았다. 가슴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거친 말들이 창틈을 뚫고 와 얼이 나간 민준을 흔들어 깨웠다. 난폭한 운전자가 입에 담기 민망한 숫자들을 열거하며 곡예 운전하듯 자율 주행 자동차들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 갔다. 꿈틀대던 반달가슴곰들이 비로소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시계가 8시 40분을 가리켰다. 꾸물거리다 지각할지도 몰랐다. 민준도 얼른 직접 주행 모드로 바꿨다. 햇볕은 여전히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채수로 맛을 낸 시원한 평양냉면 한 그릇 먹기에 좋은 날이었다. 덕분에 점심 메뉴가 정해졌다. 민준의 전기차가 8차선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