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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 of Death-나를 사랑한 스파이

지구연대기 - 가까운 미래에 분명히 일어날 일들의 기록

by 조이홍

2031년 8월.

마지막 무장 경호원 두 명을 쓰러뜨린 더블 엑스는 마침내 닥터 볼턴과 마주 섰다. 그의 심장을 겨냥한 라이언 하트 LH9의 짧은 총신이 미세하게 떨렸다.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에 걸맞지 않은 행동에 스스로 놀란 더블 엑스는 평정심을 되찾으려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수백만 명의 생명이 그녀 손끝에 달려있었다. 추억은 뉴런에서 생성되는 CPEB3이라는 특정 단백질에 의해 윤색된 환영에 불과했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만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며 사사로운 감정이 임무에 개입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중요한 임무들이었다. 정의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악의 뿌리를 제거했고 치명적인 무기들은 동정심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닥터 볼턴도 인류의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 조직의 우두머리일 뿐이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결론 내렸지만 철썩거리며 밀려오는 파도에 자꾸만 허물어지는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사랑했던 연인이자 존경했던 스승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었다. 더블 엑스의 일거수일투족이 스마트 글라스를 통해 본부에 고스란히 송신되고 있었지만, 사건을 해결한 후 걱정할 문제였다.


“제발 그 버튼에서 손 떼요, 닥터 볼턴. 지금 당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지 잘 알잖아요.”

떨리는 총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더블 엑스는 LH9의 작은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멈추면 당신의 안전은 제가 보장하겠어요. 제발 멈추세요.”

빨간 발사 버튼에서 시선을 거둔 닥터 볼턴의 입가에 순간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분노와 연민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선이 이내 더블 엑스를 향했다.

“로이스, 아니 이제 더블 엑스라고 불러야 하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당신이라면 내 이상에 공감해 주리라 믿었는데, 배부른 돼지들의 사냥개 노릇이나 할 줄은 몰랐네.”

“전 그저 선량한 사람들이 온전한 일상을 누리도록 도울 뿐이에요. 그만 버튼에서 손을 떼요. 당신도 도움받을 수 있어요.”

“그 사람들이라는 게 힘세고 돈 많은 나라의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가들과 그 바보들을 뽑은 유권자들을 말하는 거잖소? 협잡꾼들에게 놀아나 하나뿐인 지구가 두 개인 것처럼 굴던 멍청이들이지. 진실을 알면서도 스스로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되기로 작정한 놈들 말이야. 모두 한통속이야. 아직 시간이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자신들 뜻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으니 이제 와 폐기 처분하려고? 내 아내도 결국 당신들이 살해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건 사고였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제가 직접 레이첼 사건을 재조사할게요. 약속해요.”

“그런다고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지는 않을 테지. 아내가 죽은 10년 전 그날 내 시계도 멈추었소. 그녀를 뒤따르리라 마음먹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지. 내가 왜 지금까지 사지가 찢겨나갈 듯한 고통을 견디며 지옥보다 못한 현실에서 구차하게 연명했는지 아시오? 아내가 끝내지 못한 연구를 내 손으로 마무리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오. 이제 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내 기나긴 고통도, 갈수록 뜨거워지는 지구의 고통도 모두 끝낼 수 있소.”

두 손을 꼭 움켜쥔 보람도 없이 LH9의 총신이 자꾸만 흔들렸다.

“우…, 움직이지 말아요, 닥터 볼턴! 방아쇠를 당기지 않게 해 줘요. 제 말 잘 들어요. 레이첼의 가설은 완벽하지 않아요. 그 나노 입자들이 성층권에 뿌려지면 대기가 어떤 연쇄 반응을 일으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어요. 불완전한 과학적 신념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될 거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로이스. 피나투보 화산 대폭발을 기억할 거요. 연기 속에 포함된 이산화황이 성층권에 흩어져 황산 에어로졸로 변해 태양열을 반사한 덕분에 기온이 내려가지 않았소? 그 폭발에 착안한 아내의 '성층권 에어로졸 주입' 가설이 옳았다는 걸 지난 10년 동안 행했던 수많은 실험으로 증명했소. 지름이 5백만분의 1센티미터인 나노 입자들을 대기의 상층에 살포하면 햇빛을 다시 우주로 반사해 뜨거워진 지구를 식힐 수 있단 말이오. 당신도 이 실험으로 온도가 낮아졌다는 유의미한 데이터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소?”

“그래요. 하지만 그 데이터는 극히 일부 지역을 대상으로 한 실험의 결과일 뿐이에요. 그런데 당신은 지금 북미 대륙과 유럽 하늘을 통제 불가능한 나도 입자들로 가득 채우려 하잖아요. 그건 지구와 인류를 대상으로 한 정신 나간 도박에 불과하다고요.”

꿈꾸는 듯 반짝이던 닥터 볼튼의 눈빛이 순간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날 모나리자에 케이크나 던지는 철부지라고 생각하는 거요? 지난 수십 년간 아내와 내가 피땀 흘려 연구한 나노 입자 기술이 미친 도박이라고요? 하하하. 옛 스승을 모욕할 의도였다면 꽤 성공적이었소. 지난 이백 년 동안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를 태우며 대기를 온실가스로 가득 채운 장본인들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광란의 축제 덕분에 자신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 이제 겨우 배고픔을 면한 국가들한테 이산화탄소를 줄이라고 강요하는 이중인격자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지구가 너무 뜨거워졌으니 다 함께 노력하자고? 가당치도 않은 소리! 대기 중에 뿌려지는 수백억 톤의 온실가스 중 우리 같은 가난한 나라들이 배출하는 양이 얼마인지 잘 알면서! 문제는 자신들이 일으키고 책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우리한테 떠넘기지 않았소. 당신들이 대기 중에 퍼질러 놓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해 아이들 입에 들어갈 거친 빵 한 조각까지 줄여야 했소. 아내가 시작하고 내가 마무리한 '태양 복사 관리 기술(Solar Radiation Management)'을 응용한 나노 입자는 우리 국민들이 흘린 피눈물이란 말이오. 고맙다는 인사는 못 할망정 정신 나간 도박이라니!”

거대한 분노가 더블 엑스를 압도했다. 엄청난 한기가 그녀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더블 엑스는 왜곡된 진실에 집착하는 과학자를 설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다고 옛 스승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15년 전 발표한 논문에서 당신도 SRM 기술로 인해 성층권 대기가 오염될 수 있다고 지적했잖아요. 나노 입자가 광범위하게 두 대륙의 대기를 덮으면 지구가 식는 정도가 아니라 빙하기가 올 수도 있고요. 설령 빙하기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그 지역에 사는 수많은 사람이 예상치 못한 기상 변화로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다고요. 과학자는 오직 경험적 합리주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강의하던 모습이 제 눈에는 아직도 생생해요. 아내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과학자로서 양심도 저버리신 건가요?”

“과학자의 양심? 후후후. 과학에 마침표란 없는 법이오. 쉼표만 있을 뿐.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라오. 하나뿐인 지구를 구하려면 희생은 불가피하오. 그 희생이 가난한 국가들 몫일 때는 자선 모금 몇 번으로 대신하더니 당신들 차례가 되니 나를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여 총구를 겨누는군. 그것 참 편안한 발상이오. 이 버튼을 누르는 게 과학자로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이자 의무요. 이제 화려한 축제는 끝났소. 그럼….”


탕탕탕!

9mm 탄알 세 발이 닥터 볼턴의 심장에 무심하게 날아가 꽂혔다. 더블 엑스는 피를 토하고 쓰러진 그를 재빨리 일으켜 안았다. 마지막 숨소리가 짐승의 울음처럼 거칠었다. 세상을 향해 저주를 퍼붓던 악마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던 생태학자의 온화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이십여 년 전 스승과 제자로 만나 인류를 위해 올바른 길을 찾자고 약속했던 날들이 더블 엑스의 뇌리에서 느린 화면으로 재생되었다. 꿈꾸는 사람에겐 죄가 없었다. 불규칙하게 들려오던 숨소리가 조금씩 가늘어졌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에서 길을 잃었다.

“정말 우리 부부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건가, 로이스?”

“…….”

“큭! 쿨럭쿨럭. 질문을 바꿔 보지. 당신이 살린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뿐인 지구에 이로운 존재들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정녕?”


마지막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닥터 볼턴의 심장이 마침내 작동을 멈췄다. 더블 엑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스파이답게 크나큰 위험에서 또 한 번 지구를 구하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지켰다.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터였다. 매일 뜨거워지는 지구를 눈치채지 못하듯. 익숙한 일상은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다음 날도 계속될 터였다. 더블 엑스는 뜨거운 피가 멈추지 않는 닥터의 주검과 나노 입자로 가득 찬 팰컨 19 로켓의 발사 버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질문이 잔잔한 호수에 던진 조약돌처럼 수많은 동심원을 그리며 그녀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켰다. 자신이 정녕 지구의 안녕을 지켜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지구는 해마다 뜨거워졌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뭄과 홍수가 번번이 많은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다.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 쓰레기가 태평양 어딘가에 거대한 섬을 만들고, 미세 플라스틱에 중독된 물고기들이 식탁 위에 올랐다. 지구의 허파라 불리는 열대우림을 불태워 들어선 거대 농장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마리의 소들이 도축되었다. 한편에서는 포장도 뜯지 않은 음식이 쓰레기통에 처박혔고, 다른 한편에서는 아이들이 음식 찌꺼기라도 구하려고 쓰레기더미를 뒤졌다. 진보주의자들은 세상이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졌다고 큰소리쳤는데, 모두에게 그런 건 아니었다. 올해 여름은 역사상 가장 더운 계절로 기록되리라 다들 호들갑을 떨었다. 연례행사처럼 매년 반복하면서 언제나 처음인 양 흥분했다. 순간 머릿속이 아뜩해진 더블 엑스의 몸이 휘청거렸다. 훈련으로 단련된 육체가 아니었다면 쓰러질지도 몰랐다. 그때 스마트 글라스에 내장된 음성 송수신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테인리스 같은 군더더기 없는 목소리였다.

“이번에도 임무를 완수했군. 더블 엑스. 축하하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윗선에서 트리플 엑스 요원을 파견하겠다는 걸 말리느라 진땀 꽤나 흘렸네. 워낙 임무를 요란하게 처리하는 친구잖나. 이번처럼 은밀한 임무에는 어울리지 않거든. 아무튼, 자네가 해낼 줄 알았네.”

“감사합니다, Q.”

“곧 현장 요원들이 도착해 상황을 마무리할 걸세. 자네는 다음 임무를 위해 대한민국 환경 수도 한울로 가게. 선선한 그곳에서 쉬고 있으면 다음 임무를 내릴 걸세."

“한울이요? 네, 알겠습니다.”

“참, 닥터 볼턴의 나노 입자 핵심 기술이 담긴 마이크로필름은 확보했나?”

“네, 마침 폐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럴 필요 없네. 계획이 변경되었네. 우리 쪽에서 나도 입자 기술을 재검토하라는 코드 원의 명령이 있었네. 트리플 엑스 요원이 조만간 자네를 찾아갈 걸세.”

“네? 이 기술이 무고한 시민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어 폐기 처분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 검토한다니 이해되지 않습니다만.”

“코드 원 명령일세. 자네나 나나 국가가 시키는 대로만 할 뿐. 더 이상 질문은 허락하지 않겠네.”

스마트 글라스를 벗어던진 더블 엑스의 굳게 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방금 떠오른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서 뱅뱅 돌며 그녀를 괴롭혔다. ‘닥터 볼턴이 옳은 걸까, 우리도 틀릴 수 있을까, 우리가 항상 정의일까?’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 비밀 요새를 빠져나온 더블 엑스는 삼나무 숲 속에 감춰둔 신형 BMW iX 운전석에 기대앉았다. 목숨을 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메타 물질 소재로 특별 제작한 차체는 빛뿐만 아니라 전자파, 음파 등을 차단하는 스텔스 기능이 있지만, 숨이 턱턱 막힐 듯한 찜통더위는 차단하지 못했다. 차량 통제 AI가 운전자를 인식하더니 재빨리 에어컨을 가동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흘리지 않던 땀방울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냉기에 비로소 멈췄다. 더블 엑스는 차 안에 마련된 안전함에 마이크로필름을 넣었다. 그녀가 아니면 누구도 열 수 없도록 설계된 안전함이었다. 만약 누군가 강제로 열려고 시도하면 안에 든 내용물은 700도가 넘는 고열에 순식간에 재로 변할 터였다. 더블 엑스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율주행 모드로 전환한 BMW iX의 푹신한 가죽 시트에 기댄 채 선루프를 통해 들어오는 따가운 햇볕에 몸을 맡겼다. 유선형의 전기차가 굽이굽이 고갯길을 곡예하듯 질주했다. 2000년대 초반 유행하던 팝 사운드가 돋보이는 힙합 음악이 하만카돈 오디오를 들썩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서 시뻘겋게 이글거렸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이 석 달째 계속되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더블 엑스는 오늘만큼은 거친 버번위스키에 실컷 취하리라 마음먹었다. 왠지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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