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연대기 - 가까운 미래에 분명히 일어날 일들의 기록
2033년 8월
“준비되셨죠, 기사님? 이 AI 카메라 보시고 친구끼리 대화한다고 생각하시고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큐!”
“죄송해요, 한 기자님, 질문이 뭐였죠? 아, 맞다. 생각났다. 택배 일 힘들지 않냐고요? 말도 마세요. 엄청나게 힘들죠. 몸 쓰는 일이잖아요.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죠. 스카이 왜건 드론이랑 뉴비 3.0 같은 택배 로봇이 물류 배송에 도입되면서 30kg 넘는 물건은 다 우리 차지가 됐으니 더 힘들죠. 게다가 지난해부터 직장인들은 주 4일 근무에 32시간만 일하잖아요. 우리는 여전히 토요일도 없이 60시간 넘게 일해요. 특수형태 근로종사자라 근로기준법은 딴 세상 이야기죠. 그나마 십여 년 전에 전국택배노조가 결성돼 형편이 나아진 게 이 정도예요. 주로 바깥에서 일하니까 계절과 날씨에 영향도 많이 받고요. 눈비 오는 날은 더 힘들죠. 특히 예고 없이 스콜이라도 쏟아지면 정말 낭패죠. 내용물이 상하는 것도 아닌데 택배 상자가 젖으면 고객들이 싫어하거든요. 모든 고객이 다 그런 건 아니에요. 천사 같은 고객들도 얼마나 많은데요. 그래도 기후 변화인가 뭔가 때문에 날씨가 오락가락하니 죽을 맛이에요. 한 기자님도 알다시피 시도 때도 없이 폭우가 쏟아지잖아요. 이건 뭐 누가 꼭 장난치는 것 같다니까요. 그래도 그러려니 해야지 별수 있나요. 이미 세상이 변해버린 걸요. 4차 산업혁명이다 뭐다 해서 로봇들이 인간의 일을 하나둘 가로채는데 우리는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요. 잠잠하다 싶으면 툭 튀어나오는 바이러스 때문에 택배 물량은 늘 차고 넘쳐요. 10시 전에 일 끝내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죠. 욕심 안 부리고 체력 받쳐주는 만큼만 일하면 저랑 우리 반지가 먹고살 만큼 벌어요. 아, 반지는 제가 키우는 비글이에요. 한창 재롱떨 나이라 고 녀석 보는 재미로 살죠. 젊을 때는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하루빨리 이 일 때려치우고 싶었는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니 부질없다 싶어요. 우리 둘이 끼니 걱정 안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돈 싫어하는 사람 없지만 욕심부리면 끝이 없잖아요. 우리 센터에서도 얼마 전에 젊은 친구 하나가 봉변당했잖아요. 올해로 벌써 네 명째예요. 그런 일을 곁에서 지켜보면 마음이 좀 그래요. 손가락 몇 번 쓱쓱 움직이면 아침에 주문한 물건이 반나절이면 오는 시대잖아요. 텃새들 자리를 뺏은 드론이 하늘에서 택배를 나르고, 인도에서는 택배 로봇이 부지런히 굴러다니죠. 세상은 더 편해졌는데, 우리는 왜 갈수록 힘들어지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좀 답답하죠.”
“회사랑 관계요? 그냥 그래요. 플랫폼 회사들이 다 그렇죠. 일반 직장인들이랑 다르지 않을 거예요. 하긴, 우리 반장님은 옛날보다 훨씬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10년 전만 해도 택배 기사가 분류작업까지 책임졌잖아요. 요즘은 상·하차뿐만 아니라 적재까지 자동화돼서 기사들은 배송만 하면 되니까 확실히 편해지긴 했죠. 스마트 물류 시스템이 좋긴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새벽에 출근해서 오전 내내 분류작업 하다 점심도 거르고 배송 나가는 일이 흔했데요. 어휴, 요즘에도 그러면 누가 이 일 하려고 하나요. 당장 그만두죠. 택배 기사가 무슨 강철 로봇도 아니고. 요즘 노조랑 회사랑 건당 수수료 인상 건으로 좀 껄끄럽긴 해요. 가벼운 택배는 죄다 드론이랑 택배 로봇이 처리하고, 무거운 짐들은 전부 우리 차지니까요, 우리도 휴대용 택배 로봇이나 웨어러블 로봇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건 또 자비로 구매해야 하거든요. 매년 수수료 협상 때마다 어수선하긴 한데 올해는 유독 더 심하네요. 요즘 우리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아세요? 역지사지예요, 역지사지. 온종일 노트북만 쳐다보는 사측 대표들이 하루, 아니 딱 반나절만 배송해 보면 수수료가 얼마나 박한지 금방 깨달을 텐데 들은 척도 안 해요. 기술이 조금만 더 발달하면 이 일도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말이 안 통해요. 자기들은 그 자리에서 영원히 호의호식할 줄 알죠. 다음은 자기네 차례인 줄 모르죠.”
“택배 배송 일에 보람을 느끼냐고요? 그럼요. 요즘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택배 가지고 가면 얼마나 반갑게 대해주시는지 가끔 민망할 정도라니까요. 그럴 때 보면 사람들이 정말 외로움을 많이 타는구나 싶어요. SNS에선 혼자 사는 삶이 무척 낭만적이고 화려해 보이지만, 사실 그거 대부분 연출이잖아요. 진짜 외로우니까 안 외로운 척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심지어 1인 가구는 반려동물들까지 난리도 아니에요. 처음에는 제 몸에서 강아지 냄새가 나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개들도 외로움을 탄다고 하더라고요. 매일 혼자 지내는 반지한테도 얼마나 미안한지…. 아무튼, 제가 그냥 무거운 상자만 나르는 사람은 아니구나 싶을 때 보람을 느끼죠. 가끔 문 앞에 고맙다는 편지도 써주고 한여름에는 고생한다고 시원한 생수나 음료수를 놓아두는 집들도 있어요. 겨울에는 핫팩도 놓아주고요. 그럴 때는 울컥하죠. 이런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싶기도 하고요.”
“길거리에서 택배 로봇을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궁금하다고요?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그냥 참 너희들도 애쓰는구나 뭐 그 정도 느낌이죠. 언젠가 우리 일을 완전히 빼앗아 가겠지만,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잖아요. 악당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처음 드론과 택배 로봇이 도입될 때만 해도 곧 택배 기사가 사라지리라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았잖아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졌으니까요. 가까운 거리도 멀리 돌아가거나 해킹 문제 같은 거 말이에요. 한 기자님도 기억하시죠? 코카 콜라 상자를 싣고 가던 드론이 주파수 가로채기로 강남 8차선 도로 한가운데 떨어져 난리가 났었잖아요. 결국 가벼운 물건은 택배 로봇이 맡고 섬이나 산골 마을처럼 접근이 어려운 지역은 드론이 맡게 되었죠.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이 일에서 우리 인간이 완전히 배제되는 불행은 생기지 않을 것 같은데, 한 기자님 생각은 어떠세요? 제가 좀 낙천적인 편이죠. 하하하.”
“한 기자님, 인터뷰할 거 더 남았어요? 수다 떠느라 물량이 좀 밀려서요. 자정을 훌쩍 넘겨야 끝날 것 같은데. 꿈이나 소원 같은 거 있냐고요? 글쎄요. 반지랑 행복하게 사는 거 말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 맞다. 하나 있어요. 번개 배송, 새벽 배송 이런 건 좀 없어지면 좋겠어요. 우리 택배 기사들이 힘들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세상이 너무 빨라지잖아요. 자동차도 우리가 사는 세상도 속도에만 너무 집착하면 탈 나기 마련이잖아요. 여기저기 서행 구간도 마련해서 가끔은 천천히 가야죠. 한 번씩 브레이크도 밟아주고요. 급하면 동네 마트에서 사면 되잖아요. 산책도 할 겸 동네 한 바퀴 도는 거죠. 요즘 골목골목마다 개성 있는 식당들도 은근히 많거든요. 직업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니까 그런 정보는 빠삭해요. 암튼 너무 빨리 가면 일나요. 다 함께 천천히 가야죠. 너무 뻔한 말을 했나요? 마지막 이야기는 기자님이 알아서 편집해 주세요. 이제 정말 끝난 거죠?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친구들한테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소문 쫙 냈으니까 실물보다 잘생기게 나오게 해주셔야 해요. 꼭 부탁드려요. 수고하셨습니다, 한연호 기자님.”
택배 기사 정근이 모니터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이틀 후 정근은 자신의 지하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무단결근한 그를 걱정한 동료 기사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했고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연호는 숨진 정근의 옆을 끝까지 지켜준 반지를 떠올렸다. 정근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헛헛한 마음이 아주 조금 위로되었다. 연호가 정근을 밀착 취재한 ‘4차 산업혁명 시대, 어느 택배 기사의 하루’는 '택배 없는 날' 저녁 방송될 예정이었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결국 불발되었다. 방송은 전파를 타지 못했지만, 연호는 처음으로 회사 방침을 어기고 편집본을 그의 부모님께 전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노부부에게 아들의 환한 미소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다행히 정근의 죽음은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오늘 비로소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연호는 왠지 기분이 씁쓸했다. 그의 죽음을 과로사로 인정받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자정에 주문한 물건이 다음 날 새벽에 도착하는 초고속 시대, 그 일을 온몸이 부서지도록 해낸 택배 기사의 죽음을 규정하는데 왜 그토록 긴 시간이 걸렸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근이 말한 세상의 브레이크는 정작 자신의 죽음을 인정받는 데에만 작동했다. 회색빛 빌딩숲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굵은 빗방울들이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렸다.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는데 또 달갑지 않은 스콜이었다. 연호는 어디에선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수많은 정근을 떠올렸다. 기왕 퍼붓는 김에 오늘 하루쯤 세상이 멈추면 좋겠다고 혼잣말했다. 정말 그러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굵은 빗방울이 온통 세상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