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연대기 - 가까운 미래에 분명히 일어날 일들의 기록
2029년 3월.
흩날리는 벚꽃 사이로 완연한 봄기운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일곱 빛깔 솜사탕처럼 한껏 차려입은 사람들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평소 같으면 자동차들로 빈틈없을 2차선 도로가 손을 맞잡은 연인들과 가족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누구도 사람 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번거로움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동이 걸음의 목적은 아니었다. 틱톡에서 화제가 된 인생 쇼츠를 건질 수 있다는 핫스폿에서 몇십 분째 차례를 기다려도 누구 하나 미간을 찌푸리지 않았다. 일 년에 딱 한 번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만나는 날 사람들 마음도 덩달아 뭉게구름 위를 날았다. 조금 이른 감이 있는 3월 초, 만개한 벚꽃이 남도를 화사하게 물들이면 3월 중순에는 어김없이 대한민국 중심 서울에도 벚꽃의 향연이 펼쳐졌다. 예년보다 사흘이나 앞당겨졌지만, 대왕 팝콘처럼 터진 꽃망울 앞에 도취된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벚꽃길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여의도 윤중로였다. 국회의사당을 끼고 한강 변을 따라 이어진 1.7㎞에 달하는 거리를 촘촘하게 메운 1,600그루 왕벚나무는 누군가가 동시에 전원 스위치를 올리기라도 한 듯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렸다. 바위처럼 단단한 심장을 가진 사나이이라도 숨이 멎을 만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많은 이들을 일상으로부터 고립시킨 변종 바이러스로 폐쇄된 거리가 2년 만에 개방되어 더 많은 사람이 윤중로로 쏟아져 나왔다. 수도권 곳곳에, 심지어 동네마다 예쁘기로 소문난 벚꽃길이 두세 군데는 있었지만, 사람들은 윤중로 벚꽃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특별하기라도 한 듯 이 길에 열광했다. 살랑대는 강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비를 맞은 이들은 천국에도 계절이 있다면 분명 봄이리라 확신했다.
완벽하게 평범한 봄날이었다. 자로 잰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왕벚나무 주위로 노란 꽃망울이 예쁜 개나리들도 봄 경치를 즐기러 나들이 나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화려한 벚꽃에 봄의 여왕 자리를 내주었지만, 추위를 잘 견디는 수수한 개나리는 꾸준히 사랑받는 봄꽃이었다. 단체로 외출이라도 나왔는지 앳된 얼굴을 한 장병들이 최신형 아이폰을 자랑하며 순간을 담아내느라 시끌벅적했다. 첫 데이트 나온 젊은 남녀가 닿을 듯 말 듯 거리를 유지한 채 다정한 침묵으로 장병들 사이를 서둘러 지나갔다. 소담하게 핀 개나리를 처음 보는 양 아빠 어깨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부리나케 꽃밭으로 내달렸다. 알에서 막 깨어난 병아리 두 마리가 앙증맞게 그려진 분홍 꼬까옷을 입은 아이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짹짹 참새 소리가 났다. 뒤뚱뒤뚱 걷는 걸음이 위태로워 보여도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뽀얀 고사리손이 마침내 작은 꽃 한 송이를 움켜쥐었다. 봄의 여신이 선사한 선물이 신기한 듯 한참 동안 꽃송이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정은 행여 꿀벌이라도 나타날까 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봄꽃들이 지천으로 핀 윤중로에서 노랗고 작은 곤충은 언제나 1호 경계 대상이었다. 소싯적 지금의 남편인 재중과 윤중로 벚꽃데이트를 즐기다 꿀벌에게 호되게 당해 응급실까지 실려 갔던 혜정으로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윙윙대는 소리가 조금만 들려도 딸아이를 낚아채 내달릴 참이었다.
그 순간 봄날 오후의 온기치고는 제법 후끈한 바람이 윤중로를 뒤덮었다. 근처 베이커리에서 문이라도 열어 놓았는지 바람 끝에서 갓 구운 식빵 냄새가 풍겼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단단히 차려입은 혜정은 걸치고 있던 하늘색 울 카디건이 갑갑했다. 옷을 벗어 에코백 안에 넣으려다 그만 손에서 놓쳐 버렸다. 하늘하늘한 카디건이 마치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처럼 꽃잎들 위로 우아하게 내려앉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옷을 서둘러 집으려다 누가 자신에게 얼음이라고 외치기라도 한 듯 혜정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숨을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마치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왜 자신에게 의식이 있는지 그녀조차 알 수 없었다.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혜정은 무심하게 카디건을 집어 에코백 안에 넣었다. 봄꽃이 가득한 길 위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저마다 행복한 순간을 즐겼다. 깊게 팬 주름이 인상적인 노모의 사진을 찍어주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부인, 손바닥을 살짝 구부려 하트를 만드는 젊은 남녀, 손가락으로 만든 브이를 뒤집어 내밀며 떠들썩하게 사진 찍는 여고생들까지 평범한 일상 그대로였다. 혜정은 그 광경이 너무 익숙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 같았다. 벚꽃은 그대로 탐스러웠고, 노란 개나리 사이를 아장아장 걷는 아이와 그 뒤를 졸졸 뒤따르는 남편 또한 달라진 게 없었다. 하늘도 태양도 심지어 양털 구름 위치까지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혜정은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멀티버스가 아닐지 아주 잠깐 허튼 상상을 했다. 토끼굴로 떨어져 이상한 나라에 도착한 앨리스처럼 벚꽃 나무 주위를 서성거리던 혜정은 마침내 아주 작은 차이 하나를 발견했다. 이 세계에는 꿀벌이 없었다. 봄꽃들 사이를 바삐 날며 부지런히 꿀을 모아야 할 꿀벌들이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꿀벌이 사라졌다. 꽃이 핀 곳에 벌이 없다는 건 바닷물 속에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것만큼 자연법칙에 어울리지 않았다. 진달래와 철쭉이 활짝 핀 군락까지 뛰어가 살펴봤지만, 꿀벌 그림자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혜정에게 윤중로 일대에 꿀벌이 없다는 사실은 지구가 둥그렇다는 것만큼이나 명백했다.
푸근한 3월이었다. 혜정은 몇 달 동안 모아 온 우유 팩을 교환해 얻은 초록빛 텀블러를 에코백에서 꺼내 숨도 쉬지 않고 들이켰다. 차가운 보리차가 식도를 타고 뱃속까지 순식간에 내려갔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꿀벌이 진짜 사라질 리 없었다. 오히려 작은 녀석들은 훼방꾼 노릇만 할 뿐이었다. 문득 혜정은 궁금했다. 왜 뜬금없이 꿀벌이 떠올랐을까. 지난밤 아이가 보채 밤잠을 설쳤다. 게다가 새벽 일찍 일어나 나들이 준비하느라 피로가 곱절은 쌓였다. 아이 이유식이며 간식에 부부가 함께 먹을 도시락까지 하나하나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렸다. 잠을 쫓으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꿀벌 200억 마리가 실종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더랬다. 꿀벌은 1㎏의 벌꿀을 모으기 위해 400만 송이의 꽃을 이동하는데 그 거리가 무려 지구 4바퀴에 달한다고 했다. 꿀벌이 사라지면 더 이상 벌꿀을 먹지 못한다는 시시한 뉴스가 아니었다. 혜정은 꿀벌이 세계 식량의 90%를 차지하는 작물 100종 가운데 75종의 수분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꿀벌이 사라진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들쑥날쑥한 기온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언제부턴가 겨울은 너무 포근했고, 봄은 너무 쌀쌀했다. 뉴스를 전하던 아나운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명인 아인슈타인의 말을 끝인사 대신 전했다. “꿀벌이 멸종하면 인류도 4년 안에 사라진다고 합니다.”라는 살 떨리는 경고였다. 혜정은 바쁜 아침에 들었던 꿀벌 소식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나 싶었다. 반쯤 비운 텀블러를 에코백 안에 넣은 그녀는 아이와 남편이 있는 개나리 꽃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모처럼 온 가족이 봄 소풍 나온 김에 저녁은 근사한 비건 식당에서 외식하기로 했다. 마침 강바람이 불어와 벚꽃 비가 내렸다. 이제 하루 이틀만 지나면 탐스러운 벚꽃들도 흔적 없이 사라질 터였다. 하룻밤 풋사랑처럼 벚꽃의 시간은 언제나 짧고 강렬했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던 혜정은 자신도 모르게 <벚꽃 엔딩>을 흥얼거렸다. 요맘때가 되면 언제,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였다. 흥겨운 노랫소리와 함께 유난히 더운 봄날의 오후가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