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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Oct 07. 2023

치킨 두 마리와 바꾼 수천만 원

미니멀리스트의 길 

 큰마음먹고 정장 세 벌을 한꺼번에 장만했더랬습니다. 똑같은 옷만 계속 입으면 금방 닳아 오래 입지 못한다는 아내의 조언 덕분이었습니다. 해를 넘긴 상품이라 제법 저렴했지만, 한두 벌도 아니고 세 벌이나 되기에 2백만 원을 훌쩍 넘겼습니다. 월말 카드 값이 걱정되어도 한살림 장만한 듯하여 마음 한구석이 뿌듯했습니다. 정장 세 벌을 장만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회사 온라인 게시판에 '사내 복장 변경 안내'라는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거짓말처럼 '스마트 캐주얼'의 新시대가 열렸습니다. 전쟁터에서 휘두르려고 벼려 두었던 무기는 햇빛도 보지 못하고 창고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무슨 올림픽도 아니고 4년 주기로 겨우 한 번 꺼내 입다가 그 기회마저도 사라졌습니다. 거의 새것과 다름없는 정장 세 벌과 가장 아끼던 은갈치 양복을 포함해 모두 여덟 벌의 옷들이 기나긴 겨울잠에 들어갔습니다. 


 어디 양복뿐인가요. 한때 직장 생활의 유일한 즐거움은 명품 넥타이를 수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작은 결혼 선물로 받은 에르메스 넥타이였습니다. 강남역 거리에서 세 개에 만 원 하는 넥타이를 주로 구입했더랬습니다. 품질도 디자인도 나름 괜찮았습니다. 어디요. 에르메스를 선물로 받던 날 제가 우물 안, 아니 비 온 후 생기는 물웅덩이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렇다고 명품에 눈이 휙 돌아간 건 아니었습니다. 1년에 두세 번 해외 출장 갈 때마다 면세점에 들러 장만하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몇 해 지나자 넥타이를 보관하는 수납장 안에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습니다. 밥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오늘은 어떤 멋진 친구와 길을 떠날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행복 역시 新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작정한 아내가 추석 연휴 동안 대청소를 실시했습니다. 첫 번째 타깃은 몇 년 동안 입지 않는 옷들이었습니다. 평소라면 아파트 주차장에 있는 헌 옷 수거함에 내놓을 테지만, 물량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해 '전문가'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직접 회수해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뿐더러 kg 당 얼마하는 식으로 비용도 지불한다고 했습니다. 일석이조다 싶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손 한 번 대지 않았던 옷들이 하나둘 옷장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내 생일에 선물해 준 옷(본인 스타일 아니라고 몹시 싫어했었죠, 이후에 옷 선물은 금지되었습니다), 아내가 선물해 준 옷(중국 공산당 간부 같다고 회사 동료들이 놀려 다시는 입지 않았더랬죠, 아마), 패밀리 세일 한다고 카드 값 걱정 안 하고 왕창 장만한 옷, 다이어트에 성공해 입겠다고 벼르다 실패한 옷 등등 한 벌 한 벌 추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종종 버리기엔 아까운 옷들도 눈에 띄어 따로 빼놓으려고 했지만, "이고 살네? 몇 년 동안 안 입은 건 앞으로도 안 입어." 아내의 단호함에 결국 포기했습니다. 헌 옷을 담은 비닐봉지가 하나둘 늘어나더니 스무 개를 돌파했습니다. 대충 계산해도 옷값으로 수천만 원은 지불했겠다 싶습니다. 물론 그 안에 새것과 마찬가지인 정장과 명품 넥타이도 담겨 있었습니다. 넥타이 때문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만, 아내 의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가정의 평화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 아무튼, 이 많은 옷들이 도대체 집안 어디에 있었던 건지 신기했습니다. 더 신기한 건 그렇게 덜어내도 옷장에는 여전히 옷이 한가득이었습니다. 미니멀리즘의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옷을 회수하기 위해 방문한 전문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근래 들어 이렇게 많이 내놓는 집은 처음이랍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동료와 함께 올 걸 그랬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무게를 달고 수차례 지하 주차장을 오갔습니다. 고생하는 전문가를 위해 아내가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대접했습니다. 한 시간쯤 후, 마침내 연휴 하루를 꼬박 바친, 수천만 원이 넘는, 지난 십수 년의 추억이 담긴 옷들의 가치가 결정되었습니다. 4만 원, 겨우 4만 원을 살짝 넘기는 액수였습니다. 시간의 무게와 추억의 가치를 모두 뺀, 피륙이라는 물리적 특성만을 고려한 옷들의 경제적 가치는 치킨 두 마리 값이 전부였습니다. 조금 박하다 싶지만, 예상만큼 표는 덜 나지만, 집이 조금은 가벼워졌으리라는 사실에 만족했습니다. 살짝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내 말대로 이고 살 것도 아닌 걸요. 연휴 마지막 날, 10월 3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수천만 원짜리 치킨 두 마리를 배달해 온 가족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런대로 기분 좋은 연휴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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