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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23. 2023

누가 선풍기 틀어놨소?

가을 타나 봐...

엿가락처럼 늘어진 여름이 막바지 오기를 부리는가 싶더니 아침, 저녁 선선한 바람이 어느새 옷장에 고이 모셔둔 겉옷 근처를 기웃거리게 합니다. 일교차가 심해 가족 4명 중에 3명이 코를 훌쩍입니다만 창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를 집안으로 들이는 것으로 새날을 시작합니다. 폭염에도 웬만해선 창문을 열고 자는 법이 없는 철저한 '아내의 문단속' 때문입니다. 밤 사이 후끈 달아오른 이산화탄소들이 창문을 여는 순간 후닥닥 꽁무니를 뺍니다. 이렇게 독하디 독한 집도 없다며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어디 재미있는 일 없나 대기를 방황하던 순박하고 신선한 산소들이 활짝 열린 창문 사이로 쏜살 같이 날아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에서 엄청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 찰나의 순간, 말복 더위라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창문을 여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창문을 열다 그만 화들짝 놀랐습니다. 새벽 수영 간 아내가 아침부터 선풍기를 틀어놓았나 싶었습니다. 뾰족했던 마음이 가을바람에 금방 수그러들었습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푹푹 찌는 여름이었습니다. 평균 기온이 1.5℃가 아니라 3℃는 상승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였습니다. 기후 학자들은 2030년까지 아직 무언가 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는데 정작 날씨는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분리수거를 좀 더 신경 쓰는 일뿐이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게으른 신념은 걱정만 부추깁니다. 이 무더위로부터 너는 진정 자유로운가 자꾸만 캐묻습니다. 마음은 자꾸만 쪼그라드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이런 나태한 환경주의자에게 가을바람이 슬쩍 면죄부를 안겨줍니다. '무더운 지구' 걱정은 잠시 내려놓으라고 속삭입니다. 속도 없지 그걸 덥석 받아 안습니다. 잠시 창문 앞에 서서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받습니다.  


요즘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양 떼들이 뛰어놉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라고 해도 인간은 절대 해내질 못할 만큼 다양한 모양의 구름들이 마냥 신기합니다. 20대 청년에게 당신 눈에도 저 하늘이 예뻐 보이냐고 물었더니 당연한 걸 왜 묻느냐고 콧방귀를 뀝니다. 누구에게나 눈부신 가을 하늘입니다. 어제는 운전하다 마침 신호에 차가 정차해 구름 사진을 찍었습니다. 꼬리물기하는 3마리 물고기 구름이었습니다. 속세의 번뇌는 찰나일 뿐이라는 듯 자유롭게 헤엄치는 녀석들이 부러웠습니다. 수십억 개 물방울의 집합일 뿐인 구름에 우리는 참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 가을 타나 봅니다. 이제 정말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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