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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Sep 17. 2023

내 머릿속의 지우개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살짝 민망하지만 저는 제법 총기 있는 사람입니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공동선이나 정의에 대한 나름의 소신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성적도 괜찮아 우등상과 장학금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전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정치, 사회 전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기후 위기에 따라 미래 지구 환경이 어떻게 변할지가 최근 저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걱정 인형'만 무작정 만들 수 없으니 '지구연대기'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불혹(不惑)을 진작에 넘기고 지천명(知天命)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정신도 마음도 푸릇푸릇했던 스무 살 그대로구나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무언가를 까먹는 일이 없는 제가 며칠 전 '건망증 3단 콤보'로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총명한 내가, 우등생이었던 내가, 新-르네상스맨이라고 믿는 내가 망각의 늪을 허우적대다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솔직히 건망증 기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상하리만치 아침 출근길에 어젯밤 주차를 어디에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 방향을 몇 번이나 헤맸습니다. '맞아, 거기에 주차했었지!' 다행히 나중에 기억이 돌아오긴 했지만, 이러한 가벼운 건망조차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제 뇌는 재빨리 '자기 합리화' 시스템을 작동시켰습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하루의 긴장이 풀리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라고 속삭였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나흘 전에는 유독 주차한 구역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주차장을 얼마나 헤맸는지 출근하기도 전에 지쳐버렸습니다.  


더 큰 사고(?)가 일어난 건 그날 오후입니다. 인근 도시로 출장 갔다가 마침 거래처 가까운 곳에 우체국이 있어 택배 업무를 보았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업무를 보지 않는 작은 우편 취급국이라 서둘러 업무보다 그만 낭패를 당했습니다. 그곳에 법인카드를 남겨 두고 다른 도시로 이동해 버린 것입니다. 한참 후에 깨닫고 수십 km 떨어진 곳으로 돌아가면서 저 스스로에게 무척 화가 났습니다. 어디에 정신을 팔고 다니기에 그 중요한 법인카드를 두고 오냐고 수천번 자책했습니다. 다행히 우편 취급국 직원이 잘 보관해 두었다 돌려주어 큰 사고는 면했습니다. 법인카드가 악당 손에 들어갔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법인카드를 찾아 한시름 놓았다고 좋아하다 주유 경고등이 들어온 걸 발견했습니다. 마침 고속도로 휴게소가 가까이에 있어 얼른 주유소로 들어갔습니다. 주유하는 내내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더는 제가, 제가 아닌 게 돼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사히 주유를 마치고 법인카드부터 챙겼습니다. 영수증까지 지갑 안에 단단히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주유소를 유유히 빠져나오려는 순간 사이드 미러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주유구를 닫지 않고 출발한 것입니다. 그것도 주유 뚜껑을 달랑달랑 매단 채 말입니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비상등도 켜지 못하고 그대로 급정거했습니다. 뒤따라오는 차가 없는 건 확인했으니까요. 재빨리 차에서 내려 뚜껑과 주유구를 닫았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어떻게 세 번이나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누군가 머릿속에 몰래 지우개를 갖다 놓고 방금 전 일어난 일을 싹싹 지워버렸나 싶었습니다. 조금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설마???


'히어로즈(Heroes)'라는 미드를 좋아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초능력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도시 하나쯤 간단히 파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사람,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 하늘을 나는 사람, 시공간을 초월하는 사람 등 정말 다양한 초능력자들이 나옵니다. 많은 초능력 중에 가장 강한 건 어떤 능력일까요? 저는 다른 사람의 생각(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른 사람의 능력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도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주연급으로 등장합니다. 게다가 악당은 뇌를 통해 다른 초능력자의 힘을 빼앗기도 합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결국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대부분 뇌에 담겨 있습니다. 어쩌면 영혼이나 마음도 뇌에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토록 중요한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정말 슬픈 일이겠지요. 자신을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기억들이 사라져 버리는 건 분명 비극일 것입니다.  


그날 이후 더 이상 건망증 3단 콤보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주차한 구역도 잘 기억납니다. 제 뇌가 조금 쉬어가라고 경고해 준 것일까요? 아찔했던 건망증의 기억을 보태 조금 더 천천히, 주위를 살피고, 스스로를 살피고 살아가야겠습니다. 저는 저일 때가 가장 마음에 드니까요.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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