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홍 Dec 31. 2019

온 가족이 <천문>

사실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우다

  별다른 꿈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선생님을 좋아했다. 수업시간마다 해박한 지식을 펼쳐 놓으시는 선생님을 동경한 나머지 사학과 진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고3 초반 연극영화과 진학 포기, 고3 중반 국문과 진학 포기 후 방향을 잃고 헤매던 나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던 꿈이었다. 이것마저 잃게 되었다면 지금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만난 것도, 평생의 친구를 만난 것도 모두 그곳이었다. 


  역사를 열심히 공부해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를 공부하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과거의 사실(事實)은 근접하기 어렵다는 일종의 냉소주의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 공부의 첫걸음마를 뗀 애송이 주제에 참으로 거창한 이유였다. 사실(史實)은 누군가(대체로 승자 편)의 기록에 의하지 않고서는 실증(實證)될 수 없으나, 그 기록 자체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니 온전한 진실은 영원히 밝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도 더 열심히 역사를 공부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역사로부터 도망쳐 버린 꼴이 되었다. 벌써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역사는 늘 내게 풀지 못한 수학 문제 같은 것이었다. 풀어보려고 하자니 자신이 없고, 애써 외면하자니 개운치가 않은 무엇이었다.


  온 가족이 세종대왕과 장영실이 함께 꾼 꿈을 그린 <천문 : 하늘에 묻는다>를 보았다. 크리스마스 때 가족영화로 이미 <백두산>을 본 후라 준과 큐 형제는 이 영화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엄마&아빠 단 둘이 오붓하게 보고 오면 안 되겠냐, 우리는 조용히 집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안 되겠냐 등 갖가지 핑계를 댔다. 하지만 아내의 단호한 한 마디(안돼!)로 다 함께 천문을 보러 갔다. 결국 재미있게 볼 거면서......


  <천문 : 하늘에 묻는다>는 개인적으로 최고의 한국영화라고 꼽는 <8월의 크리스마스>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다. 세종(한석규)과 장영실(한석규)이 함께 꾸었던 꿈을 풀어냈다. 영화에서도, 실제 역사에서도 장영실은 세종의 꿈을 실현시켜준 일등 공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역사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세종실록>에도 당대 최고의 기술 과학자였던 장영실에 대해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그의 능력은 뛰어났고, 관노 출신으로 종 3품 대호군의 벼슬에 오를 정도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안여사건 이후 사라진 장영실에 대해 영화는 상상력으로 역사적 사실의 빈틈을 꼼꼼히 매워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런 상상력이 부러웠다. 물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상상력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장영실은 왜 사라졌을까, 왜 세종은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에게 태형을 내리도록 묵인했을까. 


  영화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한글(훈민정음)은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배웠다. 대학에서는 관련 과목을 듣지 못해 추가 정보는 없었다. 영화 <천문>을 보면 명나라의 천문을 그대로 쓰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대부의 반대가 그토록 극심했는데, 독창적인 문자를 개발한다는 것은 당시 시대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종실록>은 163권 154책으로 이루어져 있고, 127권까지는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어 이런 국가적 중대사는 언제 시작하고, 누가 참여하고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기 마련인데 훈민정음만큼은 반포할 때까지 언급이 전혀 없다. <세종실록>25년 12월 30일 "임금이 친히 언문 28글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이다. 


  세종 재위 기간에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정리해 보았다. (박영규의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과 민족문화대백과를 주로 참고하였다.) 

  훈민정음은 정말 세종 혼자서 만든 것일까? 선왕(태종) 때 형제와 친척의 피를 묻혀가며 강화한 왕권이 세종 18년(1436년) 정부구조의 변경으로 의정부로 분산되었다. 또한 다음 해에는 세자에게 서무 결재권을 넘겨주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지병이 있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이는 잘 알려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세종은 이때부터 문자 연구 및 개발에 집중하기 위한 시간을 갖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안여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던 세종 24년(1442년)에는 드디어 세자 향(문종)에게 섭정을 맡긴다. 이후 총애하던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을 잃고, 정비인 소현왕후도 떠나 아버지, 남편으로서 힘든 시간을 보냈으리라 추측되기도 한다. 자식과 아내를 잃은 인간 세종과 훈민정음 반포라는 시대적인 과제를 완수하려는 군왕으로서 세종의 고뇌는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도 없다. 


   좋은 영화 한 편을 보고 오랜만에 다시 역사책을 손에 잡고 읽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내가 뭐라고 역사의 진실에 닿고, 사실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고 했었던 것일까. 나는 그저 질문하는 사람,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고, 누군가가 이야기를 이어나가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이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상상력을 글로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결국 산타는 오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