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 부동(不動) 편
어린 시절 큰집에 살았습니다. 대가족이란 의미도 있지만 실제로 규모가 아주 큰 집이었습니다. 방이 12개에 마당도 제법 넓고 텃밭이 두 군데나 있었습니다. 뭐, 시골집이라 규모가 크다고 해서 잘 살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저 크기만 클 뿐. 아무튼, 명절 때가 되면 큰집(장남)도 아닌 우리 집으로 일가친척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제 관심사는 하나였습니다. 친척들이 언제 가는가였지요. 어린 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집이 참 좋았습니다. 빨리 가야 한다고 하면 무척 서운했지요. 철이 들면서 그게 다 어머니의 노고 덕분이란 걸 알게 되면서 질문은 같았지만 의미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친척들 언제 가지, 언제….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입니다. 그중 하나가 자연 그 자체의 아름다움인 듯합니다. 인간이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나비나 벌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바와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DNA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꽃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아름답게 느끼나 봅니다. 하지만 나무나 숲은 어떤가요. 기암괴석이 아니라도 바위의 모양이나 산세에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 긴 풀에 지나지 않던 난초가 어쩜 그리 생명력 넘쳐 보이는지요. 특히 신록의 아름다움은 어릴 때는 잘 보이지 않죠. 여행 갈 때 차창밖 풍경을 감상해 보라고 하면 아이들은 지루해서 싫다고 합니다. 재미로 가득찬 스마트폰이 손에 쥐어 있으니까요. '아직 인생을 몰라' 한 마디 하고 싶은 걸 참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것들이 지루하다니요. 운전하느라 감상하지 못하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데. 그런데 저도 어릴 때는 그러했습니다. 세상 지루한 게 자연이었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이 들어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들은 '不動', 즉 움직이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머니들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꽃이나 나무인 이유도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 나이 들수록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아름답다고 느낄까요.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 하지요. 척척박사인 척하는 챗GPT에게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에 대해 질문했더니 아래처럼 몇 가지 이론(?)을 들어 설명해 줍니다. 저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과거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생일 하루 전날의 풍경입니다. 지루하고 나른한 오후가 어찌나 길던지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무료한 시간을 때우려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은 반 친구들을 초대해 생애 첫 생일 파티를 열기로 했습니다. 생애를 통틀어 가장 긴 오후였습니다.
1. 비례성 이론(Proportional Theory): 시간이 빨리 흐른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한 해가 우리의 전체 삶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세 아이에게 1년은 그의 삶의 10%에 해당하지만, 50세 성인에게 1년은 그의 삶의 2%에 불과합니다.
2. 새로움의 감소(Novelty Reduction):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경험이 줄어들고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에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린 시절에는 많은 새로운 경험과 학습이 일어나기 때문에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집니다.
3. 생물학적 변화(Biological Changes): 나이가 들면서 신진대사와 뇌의 기능 변화가 시간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는 더 빨리 새로운 정보를 처리하고 흥분할 수 있지만, 성인은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질 수 있습니다.
4. 주의 집중과 시간 인식(Attention and Time Perception): 우리가 특정 활동에 얼마나 집중하느냐에 따라 시간 인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여러 활동에 대한 집중력이 분산되고, 이는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시간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니(또는 지나간다고 느끼니) 정지해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이 좀 멈추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실제로 시간은 멈출 수가 없으니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동경하는 것이 아닐까요. 2024년의 시작인가 싶더니 벌써 6월이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시간이 부스터를 장착한 게 아닐까 의심들 정도입니다. 한창 쑥쑥 자라는 쌈채소를 솎아주려 한 평 텃밭에 올랐다가 나무와 숲, 풀과 꽃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제 정말 저도 나이 들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