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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11. 2020

홀든의 이유 있는 반항

고전의 재味발견 <호밀밭의 파수꾼>

  새 책을 구입해 읽기 시작하면 책의 면지(본문 보호용)에 날짜와 간단한 메모 - 주로 책에 대한 소감이나 그즈음의 생각들 - 를 적는 버릇이 있다. 거의 대부분의 책들에 무언가를 적어 놓았다. 그 덕분에 그 책을 언제 읽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읽게 되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처음 읽은 날은 2006년 2월 27일이었다. 낙서하듯 볼펜으로 휘갈겨 쓴 글귀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어이 이 책을 읽게 되다니……. 세상은 넓고 읽을 책도 무지 많다. 어째??? 

   하루키 (상실의 시대)를 먼저 읽어서 그런지 하루키가 느껴진다.”     


  출간 시기로는 당연히 그 반대가 맞겠지만 읽은 순서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나 보다. 문체는 차치하고서라도 기숙사라는 공간과 괴짜 친구들 이야기는 <상실의 시대>에 오마주 되었다고 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상실의 시대>는 93년도에 처음 읽은 후로 두어 번 더 읽었는데 지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소설이 나오면 무조건 구입해 읽게 만들어 버리는 그의 매력에 빠지게 된 것도 다 이 책 덕분이었다. 세 번이나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그 책에 언급되었던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언젠가는 읽어야 할 도서 목록 상단을 꽤 오랫동안 차지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구입해 놓고 책장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그 책들을 볼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나를 속이는 일은 언제나 괴롭다. 그런 이유로 새 책에 대한 기대감과 드디어 밀린 숙제를 처리한다는 소회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지난 연말 다시 한번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이 책을 먼저 읽고 그다음에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두 책의 중간에 <위대한 개츠비>도 읽었다. 이 세 권의 책은 내가 이름 붙인 소위 “3대 청춘 소설”로 읽을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폭풍 속에 빠져 들게 하고, 여지없이 나를 스무 살의 나로 데려간다. 사랑이 삶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고, 사랑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깜찍한 생각을 할 수 있는, 누구라도 살면서 한 번쯤은 반짝 빛나는 정열의 황금시대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꼭 이성에 대한 감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제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스무 살의 감성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충동과 고전을 읽는 즐거움을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전해지지 않았다면 이는 오롯이 내 글쓰기가 서툴기 때문일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는 열여섯 살,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키는 6피트 2인치 (약 189cm)로 아주 크지만 워낙 소식을 하고 민감한 탓에 삐쩍 마른 체형이다. (소음인에 가깝다) 주인공을 이미지화해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유명인 중에 적당한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체형은 탤런트 겸 영화배우 이광수 씨가, 얼굴은 가수 겸 프로듀서 그레이 씨가 어울릴 것 같다. 이런 인물이 핏기 없는 얼굴로 사흘간 한겨울의 뉴욕을 헤매는 이야기가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그런 홀든은 고등학교에서 이미 세 번이나 퇴학을 당했고, 네 번째 퇴학을 당했다. 이유는 영어를 제외한 전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공부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부조리한 사회에서 성공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허위로 가득 찬 세상은 역겨움의 대상이고, 그런 사회의 축소판 같은 학교도 그에게는 증오의 대상일 뿐인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동생 피비에게 “바보들이 우글거리는 학교”,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학교”라고 말한 것은 소중한 동생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학교를 비아냥댄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 선생님이 그 앞에서 그가 작성한 역사 시험 (자율 논술) 답안지를 읽었을 때 학교(시험)를 대하는 그의 태도를 정확히 엿볼 수 있다. 나로서도 그의 패기가 왠지 부러웠다.


  “스펜서 선생님께, 제가 이집트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선생님의 강의는 매우 재미있었지만 저는 이집트인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에게 낙제점을 주셔도 괜찮습니다. 하긴 영어 이외엔 모두 낙제점을 받을 테니까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아마 대한민국 고등학교 학생이 이런 답안지를 제출했다면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이와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대학 시절 학기말 시험에서 나로서는 굉장한 모험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전공시험은 한 문제에 대해 서술하는 방식이었는데 그만 내가 집중적으로 공부한 부분이 시험 문제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주어진 문제는 쥐어짜듯 몇 줄만 써넣고 자연스럽게 내가 공부한 부분으로 나머지를 채웠다. 물론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점수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받게 될 엉망인 점수는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학을 당한 홀든은 학교(기숙사)에 머무르는 것을 포기하고 며칠 먼저 집이 있는 뉴욕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집에는 가지 않는다. 아버지한테 호되게 혼나는 것이 두렵기보다는 어머니가 가엾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퇴학 소식을 되도록이면 천천히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모아 놓은 용돈으로 허름한 변두리 호텔에 방을 잡고 뉴욕 거리를 헤매게 된다.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으며 아무 성과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홀든의 뒤를 쫓는 내내 책을 읽고 있는 나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마치 그가 독사가 가득한 구덩이 위에 가로질러 있는 흔들리는 나무다리를 걷는 어린아이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책장을 넘기면 엄청난 사건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긴장감 때문에 손끝이 파르르 떨리기도 한다. 걱정했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호텔 엘리베이터 보이에게 맞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런 위태로운 긴장감을 시종일관 유지하도록 하는 작가 J.D. 샐린저의 능력이 놀랍고 부러웠다. (게다가 이 책을 3주 만에 썼다니......)

 

  그런가 하면 홀든의 허세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키도 크고 머리도 하얗게 세었지만 고등학생 티가 팍팍 나는 그가 바에서 술을 주문하고 거절당해 마지못해 콜라를 주문하는 장면에서는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럼이라도 몇 방울 떨어뜨려 달라니 정말 천상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반항아  같이 보이는 그의 이면에 숨겨져 있던 선한 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서부로 도망쳐 외딴곳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려던 그의 꿈은 동생 피비의 순수함 덕분에 사라지고,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에 눈뜨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되는데, 그것은 결국 홀든의 착한 본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쯤에서 왜 이 책의 제목이 <호밀밭의 파수꾼>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과 동생 피비의 대화중에 나온 말이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영리한 피비는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는 오빠를 꿰뚫어 보고 그가 진정 좋아하는 한 가지를 말해 보라고 추궁한다. 죽은 동생 앨리 이외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홀든은 대신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로버트 번스의 시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나면>이 나오게 되는데 ‘호밀밭의 파수꾼’은 낭떠러지 옆에 있는 넓은 호밀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누가 보면 바보 같은 일이겠지만 그것은 열여섯 홀든이 되고 싶은 유일한 꿈인 것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작가 윌리엄 포크너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현대문학의 최고봉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그 경지의 높고 깊음을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저 책을 읽은 후 이렇게 몇 자 적어놓는 것으로 할 수 있는 바를 다할 뿐이다. 2020년의 대한민국에서 바라보는 홀든의 이유 있는 반항은 10대들에게 대놓고 권장할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숨 막히는 성공과 출세의 길 위를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아이들을 잠시 멈춰 세우고 교실 밖, 학원 밖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쉼표로써 이 책을 권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과 함께 두서없는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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