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홍 Jan 14. 2020

가벼움과 무거움, 질문도 돌고 돈다.

고전의 재味발견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믿을만한 것이 못 되는지 익히 많은 실험과 연구, 심지어 문학작품에서도 그 취약함에 메스를 들이댔지만, 일단 믿는 것은 끝까지 밀고 나가는 인간의 편집증적 경향성으로 언제나 그 주인을 복종시키고, 마음에 거짓 안식의 축복을 내려주곤 한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으로 잘못된 기억, 정확히는 믿고 싶은 만큼의 기억 덕분에 그럭저럭 과거의 일들을 반듯하게 포장한 추억으로 소환해 정겹던 시대로 그리며 살고 있다. 망각이 신의 축복이라면, 정제된 기억은 신의 서비스 정도라고나 해야 할까.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으로 시작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대학 1년 교양국어 시간 독후감 숙제가 아니었다면 결코 끝까지 읽을 용기를 내지 못할 소설이었다. 네 명의 등장인물과 이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들 속에서 결국 가벼움과 무거움의 의미(정의)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니체의 사상에서 출발해 순간과 영원, 반복과 일회성, 묵직함과 가벼움, 긍정과 부정이라는 일상의 언어들 이면에 담긴 숭고한 철학을 스무 살의 내가 감히 넘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녹색창에 단어 몇 개만 입력하면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엄청난 양의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기에 오로지 그때까지 축적해 두었던 지식과 지혜를 짜내 리포트를 작성했고 믿고 싶은 만큼의 기억이겠지만 그때 받은 점수는 생각보다 꽤 높았다. 

 

  결코 다시 한번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만난 것은 지난해 초여름 국제도서전에서였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식힐 겸 처음 찾아간 국제도서전은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평소 자주 접하는 출판사보다는 작은 출판사나 독립 출판물을 발행하는 곳들 위주로 방문했다. 하지만 몇 곳 대형 출판사는 꼭 방문해 보고 싶었고, 그중 하나가 민음사였다. 그곳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세계문학전집 파트에서 다시 이 책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물론 햄릿, 1984, 이방인 등 꼭 읽어 보고 싶던 고전들도 함께 구입했다) 25년 후의 나는 과연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괜한 도전의식 같은 것이 생겨났다. 물론 언제라도 내게 힘이 되어줄 든든한 아군, 집단지성 덕분이었다.      


  도전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집단지성도 이번만큼은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그간 어디 써먹을 곳은 없어도 인문학적 소양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는데 이 책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 니체를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겠어’라며 때마침 나를 찾아준 인심 좋은 ‘자기 합리화’가 아니었다면 밤새 소주를 마셔야만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이렇게 독후활동을 하는 것은 엉킨 실타래처럼 마구 꼬여있는 내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은 이기심 때문이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나의 실패를 비웃으며 ‘그럼 내가 한 번 도전해 볼까’하고 이 책을 손에 잡는 이가 생기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기 위해 먼저 ‘프라하의 봄’에 대해서 간단하게라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1960년대 체코슬로바키아는 국민의 민주화, 자유화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식층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운동이 시작되었고 1968년 4월 마침내 소련을 추종하는 노보트니 정권이 사임하고,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로 선출되는 등 프라하의 봄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체제 개혁 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두브체크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목표로 민주·자유화 노선을 채택하였고, 이에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했으며, 의회는 활발한 민주주의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 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1968년 8월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체코를 침공한다. 그리고 자유화 운동을 일시에 저지하고 개혁 주도자들을 숙청한다. 1969년 4월 소련은 마침내 두브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개혁파를 추종한 50여만 명의 당원을 제명 또는 숙청하기에 이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런 긴박한 시간적, 공간적 배경 속에서 때로는 무심하게, 때로는 그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한다. 유능한 외과 의사이자 자유연애주의자 토마시는 가벼운 존재이다. 그러나 평생의 연인 테레자를 만나면서 흔들리고 점점 무거워진다. 그에게 그녀는 여섯 우연의 산물로 강에 버려진 아이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결코 그녀를 떠날 수 없다. 테레자는 인생은 필연적이라고 믿는 무거운 존재이다. 그녀는 연약하지만 그 연약함으로 토마시를 공격한다. 그녀에게 가벼움은 고통이며 육체(섹스)와 영혼(사랑)을 별개라고 믿는 토마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가 (꿈에서) 더 이상 강하지 않은 한 마리 토끼가 되어 자기 품에 안겼을 때 비로소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된다. 화가이자 토마시를 사랑했던 사비나는 조국과 역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가벼운 존재이다. 그녀의 작품에 ‘자유를 위해 그림으로 싸운다.’는 설명에 항의하며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라며 격분한다. 사비나를 정부로 둔 프란츠는 그녀의 가벼움에 빠져있는 몽상가이다. 사비나와 헤어진 후 그의 환상 속에서 그녀를 더욱 이상화한다.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 현실이란 꿈을 뛰어넘는 것, 꿈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인물이다. (책의 줄거리는 고사하고 인물 정리만 하는데도 지친다. 정말 내겐 어려운 책이다)


  책의 중반부에 토마시와 테레자는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이 책은 행복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화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친 것이 아닌, 일종의 중용이라고 해야 할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저 위대한 마지막 부분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해 볼까 한다.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갯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밀란 쿤데라 역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한 지식인 중 하나였다. 소련 침공으로 그의 책들은 도서관에서 치워졌고, 그 역시 글을 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당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1984년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1990년 다시 발간되기도 하였다. 1929년생인 그는 여전히 살아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위대한 걸작을 탄생시킨 그의 삶은 가벼웠을까, 아니면 무거웠을까. 질문도 돌고 돌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위대한 철학자의 그늘은 꽤 넓게 우리 삶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을 더하면 토마시와 테레자의 애견 카레닌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따온 이름이다. 톨스토이에 대한 쿤데라의 오마주라고 한다. 

작가의 이전글 홀든의 이유 있는 반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