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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Jan 15. 2020

세 가지 소원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고요?

  누가 나에게 소원을 묻는다면 나는 준과 큐의 평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다시 나에게 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준과 큐의 평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누가 나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준과 큐의 평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가진 유일한 소원이기 때문이다. 


  큰 아이 준은 참 괜찮은 친구다. 예의 바르고 남을 먼저 배려한다.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주지만, 자기주장도 당당하게 말할 줄 안다.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은 스스로 하고 리더십도 제법 있어 남들 앞에 나서는 것도 즐기는 편이다. 준이 여섯 살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이른 새벽에 책방 불이 켜져 있어 들어가 보니 준이 숙제를 하고 있었다. 당시 학습지를 하던 준이 전날 일찍 잠들었는데, 미처 끝내지 못한 숙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날 이후로 공부에 관해서는 준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있고, 한 번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잘 해내고 있다. 


  이런 준의 아킬레스건이 바로 작은 아이 큐다. 세상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준도 큐에게는 못되게 군다. 그렇다고 준이 마냥 나쁘고 큐는 선한 희생양이라는 것은 아니다. 둘이 똑같다. 견원지간처럼 언제나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린다. 어떤 날은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처럼 서로에게 서슬 퍼런 언어의 칼날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요즘은 누가 누구를 놀렸다는 것인데 과연 누가 먼저 그런 말을 했는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 영원히 풀 수 없는 난제 같은 것이다. 아무튼 아이들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이런 고민을 주위에 이야기하면 언제나 비슷한 답변이 돌아온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주위 가족들을 보면 형제(자매) 사이이건, 남매 사이이건 할 것 없이 대체로 많이 싸우기는 한다. 싸우는 이유도 다들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옛말은 정말 틀린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언제 처음,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아이들은 많이 싸운다. 이것은 fact다. 


  다섯 누나 틈에서 자란 나는 누나들과 싸워본 경험이 거의 없다. 한 번도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정말 싸울 일이 없었다. 서로 부딪히는 일도 없는 데다가 나이 차이도 제법 있으니 싸울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누나들은 하나같이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아껴주었다. 아내는 여동생이 하나 있다. 아내도 처제와는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싸워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고래(古來)로부터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이에 해당되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도 아내도 아이들의 싸움을 버거워한다. 형제간에는 싸움이 정상이고, 싸우지 않음이 비정상인데 남들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형제간에도 싸우지 않음이 정상이고, 싸움이 비정상인 것이다. 사실 아이들 싸움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얼마간의 언어의 전쟁이 일어날 뿐이며 물리적인 충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비정상도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마음이 놓이는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현재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의 끝에 가을이 왔다가 다시 겨울이 시작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싸우고 자라야 하는 존재로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이를 멈추거나 부정할 수 없다. 설령 부모라고 해도 말이다. 유일한 해법은 때론 나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때론 세월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것, 바로 시간이다. 장기적인 처방전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오늘도 비정상의 정상화를 향한 욕망의 불꽃을 잠재우기는 쉽지 않다. 보지 않으려고 눈을 질끈 감는다. 육안으로 보지 않지만 심안으로 느껴지기에 눈을 감는다 한들 아무런 소용도 없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도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득도의 경지에 이른 것이고, 소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득음의 경지에 이른 것과 같으니 이 땅의 모든 부모는 그 자체로 존경받아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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