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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홍 Feb 28. 2020

거짓말을 거부한 죄!

고전의 재味발견 : 이방인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라는 기치의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하기도 한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이 무려 표지 디자인으로 사용된 <이방인>, 사진 속 인물이 바로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알베르 카뮈이다. 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물끄러미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무척이나 이방인스러워 보인다. 2005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찰나의 거장전’이라는 전시회를 통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들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결정적 순간’이외에도 세계적인 작가라는 명성답게 당대의 유명 인사들을 카메라에 많이 담았더랬다. 카뮈도 그들 중의 하나였나 보다. 거장들의 만남. 참으로 황홀했을 그 만남을 생각하니 부러운 마음이 한가득하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아마도 지난 한 세기 동안 (좀 더 정확히는 80여 년) 가장 유명한 첫 문장을 가진 소설을 꼽으라고 하면 많은 독서가들이 <이방인>을 첫 번째로 꼽지 않을까 싶다. 짧으면서도(길이는 중요하지 않지만) 작가의 의도나 주제가 강력하게 투영된 첫 문장을 가진다는 것은 아마도 글을 업(業)으로 삼는 많은 작가들이 대부분 원하는 바일 테지만,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경지(또는 운)는 아닌 것 같다. 다독(多讀)을 하는 독서광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지난 시간 꾸준하게 책을 읽어 온 독서 애호가로서 이 책만큼 첫 문장이 확연하게 각인된 책은 없었으니까. 물론 첫 문장이 좋다고, 첫 문장이 성공적이라고 필연적으로 작품 전체가 그렇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기억에 남을 만한 첫 문장으로 독자의 가슴에 큰 물결 하나를 일으키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 않겠는가.      


  <이방인>은 그리 긴 소설이 아니다. 사실 고전 치고는 매우 짧은 편이다. 생각보다 짧은 소설에 깜짝 놀라기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이어 두 번째인 것 같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백한 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수많은 논문을 통해 연구되고 분석된 탓에 더 이상 새로운 시선(해석)을 보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럴 깜냥도 안 되지만 카뮈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도 없는 데다가, 소설도 달랑 두 번 읽고 어떤 독후활동을 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다. 줄거리나 정리해 볼까 하는 요량으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문장들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간 몇 편의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런 독후의 흔적을 남기는 이유는 이를 통해서 단 한 명이라도 고전의 재미를 공감하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갔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독(毒)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다. 선한 의지라도 오해받기 쉽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결국 악(惡이) 되어버리는 세상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숙한 문장들이 그나마 고전을 향한 작은 불씨들도 날려버리지 않을까 늘 걱정이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엄마가 양로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장에게 이틀 휴가를 청한다. 눈치를 주는 사장에게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만 이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양로원에 도착해 어머니의 시신을 옆에 두고 담배를 피우고 밀크 커피를 마신다. 그러나 울지는 않는다. 슬프지 않기 때문이다. 입관이 끝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으나 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장례식을 치르는데 날씨는 덥고 아스팔트는 뜨거운 햇볕을 받아 녹아 버릴 정도이다. 날씨, 장례행렬, 냄새, 하룻밤 잠을 자지 못한 피로감으로 남자는 어지럽고 왠지 어리둥절하다. 마침내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도착하자 남자는 실컷 잠잘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잠시 기쁨을 느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니 토요일이다. 남자는 사장이 왜 이틀 휴가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면도를 하며 뭘 할까 궁리하다가 항구 해수욕장으로 수영을 하러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 예전 동료를 만난다. 그녀와는 썸을 타던 사이었는데 함께 수영을 하며 자연스레 연인처럼 어울린다.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는 남자의 제안에 여자는 흔쾌히 그러마 한다. 검은 넥타이를 맨 남자를 보고 엄마의 죽음을 듣게 된 여자는 놀라지만 이내 잊어버린다. 두 사람은 영화를 보고 키스를 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어본다. 남자는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한다.       


  남자의 아파트에 여자들을 등쳐 먹고사는 남자 B가 산다. 그는 자기의 직업을 창고 감독이라고 우긴다. 남자는 그와 평소 안면이 있는 정도이지만 그와 이야기하는 것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남자 B는 정부를 두고 있는데 그녀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해 피가 나도록 그녀를 때린다. 평소 그녀에게 손찌검은 하지만 때린 적은 없다는 명언도 남긴다. (갑자기 술 먹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는 누군가의 변명이 생각났다. 카뮈는 80년 전에 이런 표현을 생각해 내다니......) 아무튼 그녀를 혼내줄 요량으로 발길로 차 버리는 뜻의, 그러나 동시에 여자가 후회하도록 할 만한 사연을 섞어서 편지를 보내고 싶은데 남자 B는 그럴 능력이 없어 세상 물정에 밝은 남자에게 부탁을 한다. 남자는 여자를 혼내주고 싶다는 남자 B의 기분을 이해하고 대신 편지를 써준다. 둘은 친구가 된다.       


  남자와 여자 친구, 남자 B는 해안가 별장에 사는 친구로부터 초대를 받았다. 그곳에서 남자 B가 혼내주었던 여자의 오빠와 무리들(아랍인)을 만난다. 충돌 중에 남자 B는 팔에 칼을 맞는다.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온 남자 B는 다시 해안으로 나가고 남자는 그와 함께 나간다. 무리들과 다시 만난 남자 B는 권총을 겨누지만 남자는 사나이답지 못하다며 총을 건네받는다. 그사이 무리들이 달아나 버려 남자 B의 기분은 좀 풀린다. 지독한 더위에 남자는 혼자 해안을 걷다 도망친 무리들 중 하나가 바위 그늘에 얼굴만 가리고 누워있는 것을 발견한다. 둘은 서로를 발견한다. 남자를 발견한 그는 단도를 겨눈다. 남자에게는 권총이 있다. 너무 뜨거워 공격적인 태양과 바다에서 실어오는 뜨거운 바람 그리고 그를 향한 눈부신 빛의 칼날 때문에 남자는 방아쇠를 당긴다. 그리고 이미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남자는 네 번의 짧은 노크로 불행의 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이 일로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는다. 예심판사를 만난 남자는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심판사는 신 앞에 용서를 구하라고 하지만 남자에게 그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느냐는 질문에는 진정한 후회라기보다는 차라리 좀 귀찮다 싶은 느낌이라고 대답한다. 남자에게 붙여진 관선 변호사는 그에게 엄마의 죽음에 마음이 아팠냐고 물어보지만 그는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엄마를 사랑했지만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라고 말한다. 변호사는 법정이나 예심판사 앞에서 그러한 말을 하지 말라고 다그치지만 그는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말해 버린다. 법정이 열리고 재판 과정에서 남자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울지 않고, 잠을 자고 담배를 피우며 밀크 커피를 마셨다는 사실에 관심이 집중된다. 장례식 후에 수영을 하러 가고 여자를 만나고 영화를 보러 간 사실 역시 부각된다. 이를 통해 검사는 남자의 영혼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며 영혼도, 인간다운 점도, 도덕적 원리도 없다는 점을 들여 그에게 관용을 베풀기보다 정의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배심원에게 호소한다. 결국 남자는 재판장으로부터 프랑스 국민의 이름으로 공공 광장에서 목이 잘리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사형이 선고되었다. 


  카뮈가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유희’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게 된다. 즉 그는 거짓말을 거부했다. 여기서 거짓말이란 있지 않을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저 자신이 느끼는 대로 말하고 심플하게 살고 싶은 뫼르소는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자신의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 까닭에 심플하게 살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에게 형식적이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고 말하기를 요구하지만 그는 오히려 귀찮은 일이라고 대답한다. 결국 사형 선고를 받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뫼르소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으로 남는다. 그는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동질감을 느끼고 예전에도,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의 마지막 소망과 함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와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에서 카뮈는 ‘재판의 세계’를 강력하게 공격한다. 사실 작금의 우리 현실과도 많이 유사해 이 부분을 중심으로 글을 써볼까 생각하다가 금방 포기해 버렸다. 나는 뫼르소처럼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감정을 은폐하지 않는 데에는 소질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소심해져 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들과는 달리 인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를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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