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회를 왜 다니는가?
미국에서 교포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의 신앙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고국에서 떠나 생판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며 한 가족을 책임지고 산다는 것은 그리 녹녹한 일이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과 우울감은 가끔 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게 한다. 이렇게 미국에서 사는 게 맞나? 왜 이러고 사나?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초반에 미국에서 학생으로 생활하고 사회 초년병으로 살아갈 때는,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떻게 해서는 현지인들과 가까워지려고 했고, 그들에게 맞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언어와 문화에 어느 정도에 적응이 돼 가니, 나에게 맞는 사람들을 찾아서 마음을 나누는 게 더 중요해졌다. 더구나 이혼 이후 내 인간관계의 폭은 현격히 줄어 있었다. 회사를 통해 만난 몇몇 동료들과 대학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삶이 지나치게 단순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게 큰 도움을 준 공간은 바로 교회였다.
초등학교 3-4학년 정도로 기억된다. 불교 신자이던 엄마는 언니를 시켜 동네 교회에서 놀고 있는 나를 교회에서 끌어내 크게 혼을 내셨다.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무대를 동경하고 노래 듣는 것을 좋아했던 내게 교회는 늘 매력적인 공간이었으나 교회는 공연장 이상의 특별한 공간은 아니었다.
대학원에서 기독교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끔 주말에 교회에서 음악을 듣고 공짜 베이글을 먹고는 했지만 내게 기독교는 멀게만 느껴졌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샌프란에 있는 한 교회를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똑같은 결과였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좀체 다가오질 않았다. 그러면서도 기독교 친구들을 만나면 그들의 정서와 신에 대한 신뢰감을 부러워하곤 했다. 무엇보다 교회 무대에서 듣는 노래를 들을 때면 나도 언젠가는 무대에서 근사하게 노래를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러던 내가 2019년 12월에 우리 동네에 있는 한국 장로교회에 가기로 결심을 했다. 이혼이라는 회용돌이 속에서 나는 유권이와 외로웠고 우리를 지켜줄 공동체가 필요했다. 그동안 한국인 커뮤니티에 속해 본 적이 없는 나는 교회 식구들을 만나면서 천천히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따뜻한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하고 비슷한 지점에서 같이 웃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 되었다. 어른들은 유권이에게 관심을 보여주셨고, "유권이 많이 컸구나" 이런 상투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그 말에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교회 구역모임 식구들과 점점 더 가까워졌고, 그중에서는 평생 오래갈 수 있는 친구들 몇몇도 만나게 되었다.
교회에 다닌 지 5년 정도 지난 지금, 교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좀 복잡하다. 여전히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교회에 헌신하는 모습, 한 끼라도 더 먹이고 싶어 하는 어머님들의 마음, 또 봉사와 희생을 생활화하시는 교인들에게 적잖이 감동을 받지만, 점점 교회 사람들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이 껄끄러워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관계를 조절하고 해결하고 더 좋은 공동체를 도모하는 것이 내 관심은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의 몫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러한 일에 시원한 결론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하지 않는다. 성경의 원칙이나 상식 선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너무 다르다. 한국에서 살았다면 만날 가능성이 적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교포로 살아간다는 공통점만으로 모여있으니 오해와 갈등의 소지는 더 클 수밖에 없다.
어떤 관계이던 내 경계를 잘 지키고 또 상대방의 경계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미국에서 setting the boundaries라는 개념은 통속적으로 한국에서보다 더 강조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교회 식구들에게 마음을 열어갔고, 정이 가는 친구들이 생겨가고, 그 안에서 중심을 잃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흉보기도 하고, 마치 내 주관이 진리라도 되듯 그들을 정죄하기도 했다. 그런 날 바라보면서, 물론 나도 인간이기에 마음이 흔들리고 치우칠 수는 있으나 내 마음이 더이상 휘둘려서는 안 된다.
각자 다 다른 교육환경, 가정환경, 사회환경을 가지고 살아왔고, 무슨 이유에서건 내가 갖고 있는 가치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것이 최상이다. 깊이 이해하려 할 필요도 없고, 나와 맞지 않다고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에겐 위안과 격려가 필요하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곳이다. 신을 믿어도, 믿지 않아도, 전쟁 포로가 되어도 문을 열어주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에 걸어 들어오는 사람을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걸어 나가는 사람을 누구도 말릴 수도 없다. 그건 각자의 몫이고, 하느님과의 그들 둘만의 일이다.
내 중심을 다시 잡고 말조심하자고 다짐한다. 관심과 애정은 주되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고, 의견을 얘기하되 설득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도움을 주되 안 도와준다고 섭섭해하지 않는 그런 관계들이어야 한다. 내 일상의 하나로서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며 교회 생활을 하고 싶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가라는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이제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곳에서 한국사람들과 만나 정을 나누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키운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지금 나는 교회에서 느끼는 위안과 격려로 충분하다. 그러나 너무 뜨겁게 다가가지는 말자. 화상 입는 건 싫다.
교회건, 직장이건, 친구들이건 모든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교회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운다. 예전에 어른들이 미국에서 살려면 교회는 꼭 나가야 한다는 말씀, 이제는 이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