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삼천지교의 진리
초등학교 1학년 즈음에 우리 집은 작은 상갓집으로 이사를 갔다. 일층에는 작은 가게가 두 개 있었고 집으로 가는 대문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2층에 우리 집이 있었고, 3층에는 옥탑방과 널찍한 콘크리트 마당이 있었다. 엄마는 거기에 빨래를 널었고 여름이면 바닥에 이불을 깔고 별을 보며, 엄마와 누워 잠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예전부터 무작정 사람을 좋아했다. 학교가 끝나면 불이 나게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다. 말이 많은 아이도 아니었고, 카리스마가 있어 친구들을 이끄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냥 천진난만하게 웃고 듣는 아이. 그저 친구들을 만나서 노는 게 좋았다. 혜지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가면 늘 신기한 게 많았다. 널찍한 가정집에 내부 인테리어도 근사했고, 혜지의 방은 공주 방처럼 꾸며져 있어 작은 박물관을 구경하는 듯했다. 언니는 아직도 내가 미친 듯이 놀다 집에 와서, 저녁상에 앉아 졸면서 밥을 먹던 얘기를 한다. 밥은 먹어야겠는데 눈은 감기고 고개는 떨어지고, 깨었다가 바로 다시 꾸뻑거리는 나. 엉뚱했던 내가 지금 생각해도 웃기다.
엄마에게 나이키를 사달라고 졸라도 엄마는 끄떡없었다. 드레스를 사달라고 해도 짧은 반바지 하나 달랑 사주고 퉁치는 엄마였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몇 번을 매달려봤으나 도통 먹히질 않았다. 더구나 작은 언니는 피아노를 배우며 무슨 콩쿠르 대회 같은 데 나가서 트로피를 몇 번씩 타오기도 했다. 왜 나만 안 되냐고 생떼를 부려봐야 소용이 없었다.
그때 우리 집 앞, 행길 건너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2층 창문에서 그 학원을 바라보며 언제나 저길 가보나 염원했다. 그러다 5학년 때였던 것 같다. 어떻게 했는지 학원비를 모아 한 달간 피아노를 배웠다. 그렇게 늘 아쉬운 피아노였다. 지금 우리 집에는 14년 전에 언니가 코스코에서 사준 피아노가 있다. 지금도 뚱땅뚱땅, 여전히 형편없지만, 재즈 피아노, 크리스마스 캐롤집, 팝송 피아노곡집 등 내 수준에 맞는 곡들을 연습한다. 아직도 기본기가 모자라 효과적으로 연습을 하지는 못해도 혼자 독학으로 이만큼 친다는 게 대견하다.
엄마는 신기하게도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는 내 맘은 들어줬다. 한 달에 만원. 피아노 학원비보다 더 싸서 그랬나 싶다. 우리 집 옆 건물 2층에 있는 화실이었는데, 긴 생머리를 하고 우아한 미모와 말솜씨를 가진 선생님이 좋았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화실에 가서 수채화와 유화를 그렸다. 나보다 더 세련되게 그리는 혜지의 그림 실력이 부럽기도 했고 혜지가 검은색을 잘 써서 검은색 물감이 늘 인기였다. 10개월 정도 화실에 다녔지만, 그 시간이 내 삶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색깔을 어떻게 섞는지, 나무의 색깔들은 어떻게 다른지, 구도와 관점이 뭔지, 그렇게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눈을 뜨게 되었다. 그 이후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나는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통하곤 했다.
어제는 인상주의 화풍을 그리는 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코디라는 마음이 넉넉하고 학생들에게 친절한 선생님 덕에 한국에 다녀와서도 하루 더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유권이를 그렸다. 테니스 코트에서 코치에게 배우는 사진을 따라 그렸다. 코치는 디피시라는 네팔 친구인데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유권이에 대한 애정이 커서 믿음이 간다. 그 사진에서 진지하게 가르치는 디피시, 또 진지하게 배우는 유권이의 모습, 그렇게 어른들의 애정과 가르침을 받으며 유권이가 잘 성장하길 바라는 소원이 담겨있다.
화실이 있는 건물의 1층에는 미용실이 있었다. 미용실 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미용실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어렸을 때 누가 내 꿈이 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미용사라고 말하고 다녔다. 미용실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짧은 지식을 가지고 엄마, 친언니, 친척 언니들의 머리를 스타일링해주곤 했다. 드라이를 해주면 한층 더 예뻐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그때 배운 눈썰미로 나는 유권이의 머리를 계속 잘라주었다. 집 밖에 나가기 싫어했던 유권이는 내가 잘라주는 머리에 익숙했으나 중학생이 되고 머릿결이 굵어지면서, 힘에 부쳤다. 지난 5월 드디어 아빠와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잘랐다. 스타일이 나쁘진 않았지만 성에 차진 않았다. 가끔씩은 내 머리도 자른다. 너무 길었다 싶으면 앞머리와 옆머리에 층을 내기도 하고, 뒷머리도 대충 자른다. 이번에 한국에서 미장원 언니가 어떻게 스스로 머리를 자르냐며 놀라 했다. 그러면서 미국에 가면 미용 학원에 등록해서 미용사가 돼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회사에서 나온 후, 많은 조언들을 얻었지만 미용사가 되라는 조언이 제일 참신했다.
어릴 적 우리 집 창문으로 바라보던 세상. 손 내밀면 닿을 곳에 피아노 학원, 미술 학원, 미용실이 있었다. 창문 밖을 바라보며 서성이던 그 시간, 그 공간들을 오가며 느끼고 배웠던 것들. 고스란히 내 안에 쌓여 나를 만들어갔다. 그때, 우리 집 창문 앞에 다른 공간이 펼쳐졌음 어땠을까? 지금과는 다른 나로 살아가겠지.
유권이를 생각한다. 유권이의 커뮤니티에 무엇이 있나? 그의 삶을 오가는 공간이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지 궁금해진다.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씩이나 이사하면서 아들을 가르친 교훈 - 맹모삼천지교 - 여전히 놀라운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