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배우는 희열
초등학교 6학년 때 언니의 방 안에서 흘러나오던 팝송이 시작이었다. 아바의 I have a dream를 들으며 황홀경에 빠졌던 기억. 어두 침침했던 방안,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던 그 팝송에 취해 중학교에 가면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입학식날, 엄마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인천에 있던 대한서림에 들러, 영어 교과서 카세트테이프 세트를 구입했다. 그때 영어 단어들을 들으면서 혼자서 말도 안 되는 발음을 반복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새로운 단어를 배우는 게 재미있었고 문법도 쏙쏙 들어왔다. 단어를 몇 번씩 쓰고 밑줄 치면서 스펠링을 공부하는 아이들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나는 영어의 소리에 매료되었고, 그냥 스펀지처럼 흡수하듯 배워갔다.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문영어 한 권 뗀 것이 수험 공부의 다였으나, 시험 성적은 늘 좋았다. 시험이 어려워 평균 점수가 많이 떨어져도 내 점수는 늘 높았고, 영어 선생님들이 신기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2 외국어로 고2 때부터 독일어를 배웠는데, 독일어도 마찬가지였다. 과학과목들은 거의 최저점을 찍었지만, 외국어 점수만큼은 늘 삼삼했다.
대학 영어는 차원이 달랐다. 필수과목으로 영어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점수가 쳐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원서를 읽었던 것 같은데, 어휘와 문해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 대학원에 들어갔다.
대학원에서는 거의 모든 수업이 영어 텍스트로 진행되었다. 교수님들은 죄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들이셨고 그때만 해도 저작권 개념이 없어서 원서를 카피해서 미리 읽고 수업시간에 토론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때 느꼈던 자괴감이란. 나보다 두세 살이 어린 친구들과 대학원을 다녔는데, 해외 연수 경험이 있거나 어렸을 때 영미권에서 살아본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사전보고 단어 찾아가며 한 단락 이해하기도 바빴는데, 다른 친구들은 죽죽 줄을 그어가면서 한글을 읽듯이 술술 진도가 나갔다.
대학원에 졸업할 즈음에 학교 어학당에서 영어 수업을 듣기도 했지만,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영어 회화 수업을 들어도, 딱히 연습할 상대가 없었기에 영어로 프리토킹을 한다는 건, 남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졸업 논문을 쓰면서 내 인생을 확 바꿔줄 사건이 생겼다. 그 당시 국제 기숙사는 논문을 쓰는 대학원생이나 어학당에서 공부하는 외국인들만 사용할 수 있었고, 나도 그 기숙사에서 대학원 마지막 학기를 보냈다. 논문을 마감할 즈음, 지도교수님은 영어 초록은 반드시 원어민 리뷰를 거쳐야 한다고 하셨고, 어디서 영미권 사람을 만나나 고민하다, 우연히 딱 교포같이 생긴 또래 아이를 휴게실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다 싶어서, 손짓 발짓 다해가며 부탁을 했고, 그날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절친이 되었다.
논문이 통과되고, 나는 학과 컴퓨터실에서 조교로 2년 정도 일을 했다. 컴퓨터실을 관리하고 신문제작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일이 끝나면 득달같이 달려 나가 새로운 교포 네트워크와 어울렸다. 그들의 어정쩡한 한국어와 말도 안 되는 내 영어가 섞여 엉겁결에 친구들이 되었고, 영미권의 20대 친구들의 문화를 접하며 영어에 대한 울렁증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20대 후반에 느지막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LA 근처에 있는 주니어 칼리지에 다니면서 영어, 미국역사, 경제, 회계 같은 기초과목들을 통해 영어를 다시 배웠다. 2년 이후, 몬트레이에 있는 통번역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내 영어 실력은 전문 통역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영어를 제대로 배운 것은 일을 통해서였다. 영어로 말을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태. 작은 번역회사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2년 동안 일을 했는데, 그때 영어 스트레스로 인한 자괴감과 열등감은 말도 못 한다. 회사 친구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내 자신감을 갉아먹었다. 그러다 오토데스크로 회사를 옮겨 일을 하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영어 울렁증이 사라졌다. 언어가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깊이와 논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언어와 문화를 배워가는 것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생소했던 소리들이 익숙해지고, 새로운 의미들이 다가오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알아가는 재미. 그러다 보니 24년이 흘렀다. 긴 세월이 필요했으나, 영어로 소통이 가능해진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중의 하나이다. 새로운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을 더 신기한 눈으로 보게 되었다.
요즘엔 Duolingo라는 앱으로 프랑스어를 배운다. 매일 15분, 프랑스어 기초를 공부한 지 1,000일째. 수많은 영어 단어들이 프랑스어에서 왔다는 사실, 가게나 브랜드 이름에 프랑스 말이 수두룩 깔려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왔다.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구나. 프랑스어는 나의 세 번째 언어이다. 은퇴하면 언젠가 파리에서 언어연수를 받으리라 꿈꿔본다. 새로운 세상이 또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