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과몰입이 별로인 이유
대학교 4학년 때 취업을 준비하면서 도서관에 자주 다녔었다. 어느 날 교육 심리학과 선배가 성격테스트가 있는데 해 보라고 했고, 그때 처음으로 MBTI를 접했다. 정확하게 무슨 타입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충동성과 창의성이 강하게 나왔던 것 같다.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르면 미친 듯이 즐거워하고 관심이 없는 일은 아예 쳐다보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도 직관형 (Intuition)과 인식형 (Perception)이 섞여서 그런 결과를 낳던 것 같다.
그다음에 접한 것은 회사 생활을 하면서였다. 한 10여 년 전에 MBTI 테스트가 큰 유행이었는데, MBTI전문가들이 와서 팀원들의 MBTI 결과를 분석하고 협업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때 내 타입은 ESTP였다 (외향, 감각, 사고, 인식형). 재미있었던 것은 외향, 사고, 인식면의 지수가 절대적으로 높았고, 감각과 직관 부분은 거의 반반이 섞여 있었다.
나는 확실히 외향성이 강한 사람이다. 정보던, 교감이던, 영감이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에너지를 받는다. 예전에는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주변에 두려고 했고,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나이가 들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기도 하지만, 장시간 혼자 있으면 우울해지고 나가서 장이라도 보고 와야 마음이 좀 풀린다.
또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인식적 성향. 기본적으로 마감일이 없으면 잘 움직이질 않는다. 일의 시작은 미팅을 잡으면서 이루어지고, 막판에 짜릿하게 일이 끝나는 걸 좋아한다. 미리 일을 시작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웬만큼 복잡한 일이 아니고서는 일의 흐름을 미리 계획해서 진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자료를 보면서 다음 해야 할 일을 찾아간다. 여행을 갈 때도, 도착지와 비행기표만 사놓고, 예약할 필요가 없으면 보통 현지에서 전날, 다음날 여행 계획을 짠다. 그러다 보니, 상황이 변해도 그런가 보다, 누가 약속을 펑크 내도 뭐 일이 있겠지, 일이 안되면 대안을 찾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보통 느긋하다는 소리를 듣고는 하지만, 이러한 성향 때문에 마감일을 넘기는 경우가 가끔 있고, 불필요하게 벌금을 내는 경우도 있다.
사고와 감정면 (Thinking vs Feeling)에서도 내가 사고형이라는 데는 의심이 없었다. 나는 타고난 공감능력이 강한 사람이기보다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해서 상대방의 감정을 예측해서 대응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사고형을 디스 하며 농담을 할 때는 은근 기분이 나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 침착한 편이긴 하지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봤을 때, 가장 중요한 척도는 판단과 결정을 어떻게 내리느냐이다. 감정 중심의 판단을 하느냐, 아니면 사고 중심의 판단을 하느냐 - 이 근본적인 질문에는 갸우뚱하기도 했다.
한편, 감각과 직관 (Sensing vs Intuition)은 그 차이가 명백하지 않았다.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오감이라는 감각에 초점을 두느냐, 아니면 구체적인 감각 정보보다는 뭉뚱그려진 육감이나 영감으로 세상을 인식하느냐가 그 차이인데, 나는 구체적인 정보가 쌓여야 문제나 상황들이 보이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했다. 감각 점수가 조금 더 높게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 아들 녀석이 MBTI에 관심을 보이면서 몇 달 전에 우연히 테스트를 같이 해 보았다. 그랬더니 감각과 직관이 뒤집힌 ENTP가 나왔다. 워낙에 퍼센트가 비슷했던 터라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몇 주 전에 또 MBTI를 해볼 기회가 생겼다. AI관련된 세미나를 들었는데, 거기서 상사의 인성 테스트 결과와 프로젝트 정보를 AI툴에 넣으면, 프레젠테이션에서 상사가 할 법한 예상 질문을 미리 뽑아주고 답변을 어떻게 할지 도와준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서 인성테스트를 해보라고 링크가 있길래 해봤더니, 결국은 또 MBTI였다.
결과는 의외로, ENFP가 나왔다. 결정방식에서 사고형이 아닌 감정형이 나온 것이다. 내가 감정형이었나? 생각해 보니, 큰 결정을 내릴 때는 내 감정에 더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오히려 인생에서 큰 결정을 내릴 때는 자세하게 장단점을 따진다기보다는 내 마음상태를 살펴보며 판단하는 편이다.
결국 나의 MBTI 결과는 ESTP, ENTP, ENFP이다. MBTI이론에서는 보통 기본적인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나이와 경험이 쌓일수록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 세 타입의 성향을 읽어보니 다 나를 잘 묘사한다. 그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느낌.
내 결과를 종합해 보면, 외향성과 인식형은 나의 근본적인 성향이고, 감각/인지와 사고/감정면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MBTI를 갖고 사람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MBTI는 단순한 도구로서, 나와 주변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시작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부부나 친구관계는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자만했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어쩌면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만이다. 사람은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잘 모르겠으면 미리 짐작하지 말고 물어보는 게 예의이다.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변화를 응원해 주어야 한다.
아들 녀석이, 내성형이라 혼자 있는 게 좋고 인지형이라 숙제를 막판에 한다는 둥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자신을 규정짓는 소리를 할 때가 있다. MBTI를 애랑 괜히 했나 싶기도 했다. MBTI 같은 툴이 우리를 가둬두는 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허무해진다. 속단하지 말고, 열어두고 지켜봐야 한다. 어딘가 나도 모르게 존재할 나를 알아가는 게 아니라, 나를 발견하고 찾아가는 과정.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경험을 넓혀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