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겨울 여행

오리건주로 로드트립을 떠나다

by 최작가

올 크리스마스 연휴는 아들과 함께. 그냥 동네에 있을까 고민하던 차, 20년 지기의 친한 친구가 오리건 포틀랜드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포틀랜드에서 강 하나 건너면 있는 워싱턴주에 다른 친구가 살고 있는데, 세 가족이 다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자고 했다.


아들 녀석에게 물어봤더니 싫은 내색이 없었다. 좀 생각해 보자고 하더니 포틀랜드 음식문화가 궁금하다며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요즘 식당 투어에 흠뻑 빠져있는 아들에게 좋은 기회로 느껴진 듯했다. 문제는 비행기티켓. 너무 늦게 계획을 한 탓에 둘이 우리 동네에서 포틀랜드까지, 1시간 50분 비행에 700불 정도. 그렇다면 차로 가자!


마린에서 포틀랜드까지 차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10시간은 족히 걸렸다. 그렇다면, 중간에 하루 자고 올라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서쪽 해안도 둘러보자는 야무진 계산을 하고, AI가 친절하게 제안해 준 호텔 중에 몇 개를 골라 숙소를 예약했다.


그동안 내가 해본 장거리 운전은 마린에서 엘에이가 가장 긴 여행이었다. 편도로 6시간 정도 운전하며 익숙한 프리웨이 5번을 타면, 지루하지만 무리 없이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번 여행은, 엘에이 여행 두 배 정도는 되는 주행시간, 게다가 타주로의 여행, 새로운 일들이 많이 벌어지겠군. 걱정반 기대반, 차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잔뜩 챙겨서 길을 떠났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오리건주로 올라가는 여행은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졌다. 지루할 거라 생각했던 프리웨이 5번은 생각보다 산과 나무들에 둘러싸여 볼거리가 적지 않았고, 오리건주에 메드포드라는 도시에서 묶었던 홀리데이 인 호텔도 가성비가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경험은 메드포드에 가기 전, 애쉬랜드라는 동네에서였다. 첫날 5시간 정도를 운전하고, 밤 8시가 넘어 저녁을 먹기 위해, 프리웨이를 떠나 지방도로로 5분 정도 운전하니 갑자기 크리스마스 불빛이 가득한,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동네가 나왔다. 알고 보니 이 동네는 연례행사로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이 열리고, 예술적 풍미가 남다른 오리건에서 유명한 동네였다. 깜깜한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갑자기 발견한 신기루 같은 동네에서 아가베라는 멕시칸 식당에서 치킨볼과 엔칠라다를 게눈 감추듯 먹고, 사탕 까먹은 어린아이들 마냥, 희희낙락 동네를 활보하다 호텔에 도착했다.


그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일찌감치 주행을 시작했다. 아들은 엊저녁에 이미 어디서 점심을 먹을지 계산이 끝난 상태였고, 난 아들이 시키는 대로 운전대를 돌렸다. 꽁냥꽁냥 계획하기 좋아하는, 비서 같은 아들이 있어서 든든했고 편안했다. 유권이는 스프링필드라는 소도시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값이 저렴하고 피드백이 좋은 러블리라는 카페였다. 캘리포니아보다 30% 정도는 싼 음식 값에 놀라고, 친절한 직원들의 서비스에 놀라고, 쾌적하고 디테일이 훌륭한 인테리어에 또 놀랐다.


오후 2시경에 포틀랜드에 도착해서 비드웰이라는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예약해 준 호텔이라 그런지 값도 좋고 모던하고 힙한 분위기가 맘에 쏙 들었다. 친구는 라운지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 호텔이 메리아트 제휴 호텔이라 자기 멤버십으로 우리도 호텔 라운지를 쓸 수 있다고 했다. 유권이와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덕분에 아침도 공짜, 라운지 안에 있는 모든 스낵, 커피와 차가 다 공짜. 여유 있게 사는 친구가 있어서 감사했다.


포틀랜드에서 보낸 이틀 동안 두 친구들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20여 년이라는 세월을 알고 지낸 우리 셋. 미국에서 같은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중 한 명은 우리 학교 교수님이셨다가 친구가 되었다. 처음 우리가 학생으로 만났을 땐, 20년 후에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지 모든 게 불투명했다. 그때 그 교수님은 젊은 나이에 교수라는 직함을 달고 통번역가로 일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모두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고 있으나, 사는 곳도, 사회경제적인 지위도, 삶의 지향점도 다 다르다. 누구는 여행과 쇼핑을 부담 없이 즐기며 먹고사는 부담에서 완벽히 탈출했고, 누구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생긴 여유와 기다림의 혜안이 훌쩍 커져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멀리서 친구들이 왔다고 새벽부터 일어나 꽃등심 바비큐를 준비했다. 앞으로 20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나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인생은 늘 진행형이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는 길은 좀 멀긴 했지만, 장거리 운행의 경력자라도 된 듯 마음이 여유로웠다. 잘 올라왔으니 잘 내려가겠지. 오후 2시 정도 출발해서 운전을 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스포티파이에서 음악을 한참 듣다가 지루해져서 오디오북을 듣기로 했다. 1929년이라는 논픽션이었는데, 미국 대공황시기 미국의 경제체제와 대공황을 좌지우지했던 인물들을 조명하는 책이었다. 좀 무겁고 딱딱하긴 했지만, 유권이도 흥미롭게 들었다.


프리웨이 5번을 4시간 정도 운전하다 101번을 타기 위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캘리포니아 최북단에 크레센트 시티라는 해안도시가 있는데, 무작정 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1시간 반 정도의 추가운전을 감수하기로 했다. 중간에 서브웨이에 들러 샌드위치를 먹는데 분위기가 스산했다. 주문받는 아저씨, 친절하고 착해 보이는데,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있다. 아, 이 동네 마약문제가 심각한가 보다.


후딱 저녁을 먹고 8시 정도에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안개가 뿌옇게 끼기 시작했다. 좀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별생각 없이 오디오북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데, 순식간에 도로 중간에 보도 블락이 깨져 있는 걸 보았다. 때는 이미 늦어버렸고, 피하지 못하고 그 보도블락을 지나쳐 버렸다. 덜컹하는 굉음이 들러더니, 갑자기 차 대기보드에 빨간 불이 들어오다 노란 불로 바뀌어, 타이어 바람 빠진 신호가 켜졌다. 타이어에 펑크가 난 것 같다. 아무도 없는, 깜깜하고 스산한 해안도로에, 옆에서 아들은 겁에 질려있고, 내 가슴도 콩알만 해졌다. 이를 어쩌나? 보험회사에 전화를 해야 하나? 숙소까지 20마일이 남은 상태. 속도를 줄이고 숙소까지 끌고 가기로 했다. 타이어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주행은 가능할 것 같았다.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을 때 그 안도감이란...


다음날 타이어 가게를 찾아 타이어를 바꾸고 나니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101번 말고 5번 고속도로를 탈걸, 오디오 북을 듣지 말걸, 그냥 비행기를 탈걸, 나이가 들어 반응속도가 늦어졌나, 이런저런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래도 바로 새 타이어로 바꿀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제야 이 해안도시의 아름다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최초로 지어졌다는 등대가 보였고, 캘리포니아의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아침 바다를 만끽했다.


마지막 돌아오는 길, 5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을 101번을 타고 남쪽으로 달리면 집이다. 중간에 유레카라는 동네에서 점심을 먹었다. 유레카는 캘리포티아주 북쪽에 위치한 도시인데, 관광객들이 왕래하는 올드타운을 제외하고는 가난과 마약문제가 심한 동네였다. 그럼에도, 갑자기 음식값, 기름값이 미친 듯이 올라갔다. 캘리포니아에 다시 돌아왔구나.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주를 차로 밟았고, 오리건에서 애쉬랜드, 메드포드, 유진, 스프링필드, 포틀랜드를 경험했고, 워싱턴에서 카마스와 뱅쿠퍼 워터프런트를 방문했다. 오랜 친구들과 근황을 나누고, 다음엔 하와이로 뜨자고 기약하고, 현지 음식과 문화를 경험하며, 유권이와 뜻깊은 추억을 남겼다.


Art of Spending Money의 저자 모건 하우절은 나이가 들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경험이 단조로와서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시간이 상대적으로 천천히 지나가는 이유는 바로 그 반대, 새롭고 다양한 경험들이 많아서란다. 그래서일까? 유권이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은 다양하고 예기치 못한 경험들로 가득 채워져, 4박 5일간의 단기 여행이 긴 여정처럼 느껴졌다.


비행기값 아끼자고 시작한 로드트립, 비행기값이 아무리 싸도 또 차로 장거리 여행을 하겠구나 생각했다. 2025년 크리스마스는 또 드라마 천국. 좌충우돌, 코미디 같은 내 인생!

캘리포니아 크레센트 시티 (왼쪽), 오리건과 와싱턴을 가로지르는 콜롬비안 리버 (오른쪽)
유레카에서 방문한 초콜렛 상점 '딕 테일러' (왼쪽), 오리건 스프링필드에 있는 카페 '러블리' (오른쪽)
크레센트 시티 등대 (왼쪽), 포틀랜드 호텔 방에서 본 풍경 (중간), 크레센트 시티 바다 (오론쪽)

크레센트 시티 등대 안 풍경 (왼쪽), 콜롬비안 리버 풍경 (중간), 스프링필드 다운타운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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