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감과 정체성에 대하여
중학교 2학년 생인 아들놈은 유난히도 한국말과 정서에 집착을 한다. 미국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한 지 오래다. 유권이는 초등학교 때 미국 성조기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기도 했다. 국기에 대한 맹세는 선택권이라면서, 엘살바도르에서 이민온 친구와 자기 둘만 거부했다고 했다.
유권이는 자의식이 생기기 전 까지는 아이들의 놀이를 주도하고, 호부가 정확한 유쾌한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은 백인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를 둘러싼 아이들과 부모들은 90% 이상이 백인이었다. 백인이 아니라, 동양인이라고 정정해 주어도 한동안 받아들이질 않았다. 그러던 녀석이 자의식이 생기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교우관계가 좁아지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그런 과정 중에, 자신이 100% 한국인이라는 생각이 더 선명해진 것 같다.
법적으로 보자면, 유권이는 군대를 가기 전까지는 이중국적자이다. 유승준 사건으로 인해 속인주의를 따르는 우리나라 법에 따라, 한국인 부모에서 나온 아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 태어나도, 한국 사람이다. 그러나, 남자아이의 경우, 군대 문제 때문에 18세가 되기 전에 선택을 해야 하는데, 유권이에게 군대 갈 거냐고 물었더니 비실 웃고는 쉽게 답을 못한다.
1년 전부터인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하면서, 내게 한국어로 대화를 하자고 했다. 처음엔 할 수 있는 대화의 내용이 별로 없더니, 이제 곧잘 한국어를 한다. 교회에서나 다른 곳에서 한국인 어른을 만나면 무조건 한국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가끔 내가 별생각 없이 영어로 말을 하면, 왜 한국어를 쓰지 않냐며, 엄마랑 영어로 대화하기 싫다고 했다. 이런 집착과 노력이 기특하긴 하지만 염려가 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유권이가 자신의 환경에서 소속감을 못 느끼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붙들고 있는 것 아닐까? 그의 정체성에 쐐기를 박는, 마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어제, 동네에서 친한 몇몇 가족들과 신년맞이 파티를 하는데 처음 만난 30대 초반의 일본인 청년이 자신도 어렸을 때, 유권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했다. 그 친구도 미국에서 태어나, 동양인이 극히 드문 마린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많은 고충을 겪었다고 했고, 자신도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렸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랬다가 일본에서 정작 생활을 해보니, 자신이 문화와 언어적으로 절대로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일본인이 되고, 일본에서는 미국인이 되는데, 오히려 그 덕에 자신은 좀 더 적응력이 강해지고 양쪽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시야가 생겼다고 했다.
그렇다면, 20대 후반에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거의 25년을 살고 있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한국에 가면, 모르는 사람들도 내게서 어딘가 모르게 외국에서 살다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 같았다. 대화를 조금 하다 보면, 반응속도가 느리고 뭔가 어리버리한 것이, 내국인처럼 빠릿빠릿한 느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도 가끔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국에서도 내 정체성은 미국에 사는 한국인이다. 여전히 한국음식, 한국말, 한국노래, 한국문화가 날 지탱해 주는 힘이다. 그래서 나의 정체성은 미국과 한국, 그 경계의 어디에선가 존재한다.
다행인 건,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점이다. 삶의 여정이 비슷한 사람들, 삶의 지향점이 비슷한 사람들과, 고국이 아니더라도 타지에서 마음을 나누고 살아가면 그만이다. 이런 독특한 경험을 나누게 되니, 관계의 폭이 짧은 시간에 깊어지기도 한다. 이방인이던, 내국인이던, 누구에게나 삶은 여정이고, 저만의 독특한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국적을 막론하고, 언어와 정서를 공유한다면 나의 정체성과 소속감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
유권이에 대한 염려는 거두어야겠다. 유권이가 언젠가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상채기가 나고,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다 또 그만의 여정을 통해 언어와 정서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겠지. 경계인이건 아니건, 누구나에게 인생은 나만의 것이다. 유권이의 인생, 두 문화를 오가는 경계인으로서 그의 삶이 어떤 경험들로 채워질지 궁금해진다.